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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Lewis - 스크루테이프 편지 中

ToBeIsToChange 2006. 6. 2. 07:51


 

사랑하는 웜우드에게

우리야 환자의 앞날이 불확실할수록 좋지. 서로 충돌하는 미래의 모습들이 마음을 온통 채운 채 희망이나 두려움을 번갈아가며 불러일으킬 테니까. 원수가 인간의 마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바리게이트를 치기에 불안과 걱정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 원수는 인간들이 현재 하는 일에 신경 쓰기를 바라지만, 우리 임무는 장차 일어날 일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지. 따라서 네 임무는 환자가 현재의 두려움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라는 생각을 절대 못하게 하는 한편, 오로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미래의 일들에만 줄창 매달려 있도록 조처하는 거다.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환자의 영혼에는 어느 정도의 악의와 함께 어느 정도의 선의가 있게 마련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품게 하는 것이지. 그러면 악의는 완전히 실제적인 것이 되고, 선의는 주로 상상차원에 머무르게 되거든.


인간의 미덕들이 우리에게 치명상을 입히려면 반드시 의지의 원에 도달해서 습관으로 자리 잡아야 하지.(물론 내가 말하는 의지란 환자가 오해하는 것처럼 이것저것 결심을 해 놓고 이를 악물고 콧김을 뿜어가며 안달복달 애쓰는 게 아니라, 원수가 ‘마음’이라 부르는 진짜 중심을 말하는 것이다.) 미덕들이 공상 속에서 아름답게 채색되고 지식인들의 인정을 받으며 어느 정도의 사랑과 존경까지 끌어 모은다 한들, 그걸로 우리 아버지 집을 벗어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미덕들을 가지고 지옥에 오는 인간들이야 말로 훨씬 더 재미있는 구경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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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웜우드에게

당분간은 정체를 숨기는 것이 우리의 정책이다. 어쨌든 적어도 아직까지는 우리 존재를 알릴 때가 아니야. 그러나 나한테는 한 가지 위대한 소망이 있다. 언젠가 적당한 때가 되면 과학을 감상적으로 만들고 신화화함으로써, 원수를 믿으려 하는 인간의 마음이 미처 열리기 전에 사실상 우리에 대한 믿음을 슬금슬금 밀어 넣는 법을 터득할 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소망이다. 생명력이라든가, 성(性) 숭배 풍조, 정신분석의 몇몇 부분은 이 점에서 유용하게 써먹을 만하다. 언젠가 우리가 ‘유물론자 마술사’라는 완전무결한 작품을 만들어 낼 그날이 오면, 즉 영의 존재는 거부하되 자기가 막연히 힘이라고 부르는 것을 직접 활용까지는 못하더라도 사실상 숭배하는 사람을 탄생시키는 그날이 오면,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이 기나긴 전쟁의 끝을 보게 될게다.


인간이 원수에 대한 극단적 헌신만 빼 놓는다면, 극단적인 경향은 무조건 부추길 만하지. 물론 언제나 그런건 아니다만 적어도 이 시대에는 그렇다. 별 열의 없이 안일한 시대에는 인간들을 잘 얼러서 더 깊이 잠들게 하는 게 우리의 소임이야. 하지만 지금처럼 균형을 잃고 편 가르기를 좋아하는 시대에는 불을 더 붙어야 한다.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환자를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지. 세속적 명분이냐 어떤 걸 추구하든지 상관없다. 집회, 팸플릿, 강령, 운동, 대의명분, 개혁운동 따위를 기도나 성례나 사랑보다 중요시하는 인간은 우리 밥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