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Lewis

C.S.Lewis -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中

ToBeIsToChange 2006. 6. 2. 07:50

1


사랑하는 웜우드('쑥'이라는 뜻 : 쑥은 쓴 맛, 고통, 고난을 상징한다) 에게

 

네가 요즘 맡은 환자의(각각의 악마가 맡은 사람을 가르키는 말) 책 읽기를 지도하는 한편, 유물론자 친구와 자주 만나도록 신경 쓰고 있다는 이야기 잘 들었다. 하지만 좀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냐? 몇 세기 전이었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었겠지. 그 시절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것이 입증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아주 잘 알아보았을 뿐 아니라, 일단 옳다고 입증되기만 하면 진짜라고 믿어 버렸으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지금처럼 생각과 행동이 따로 놀지 않았기 때문에, 일련의 추론 과정을 거쳐 얻은 결론에 따라 생활방식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우리 악마들이 주간지를 비롯한 다양한 무기를 사용해서 상황을 역전시켰다. 그 덕분에 네가 맡은 환자만 해도 어려서부터 수 십가지 상충되는 철학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에서 난장판을 벌이는 데 익숙해져 있을 게야. 그래서 어떤 교리를 보아도 ‘참이냐 거짓이냐’를 먼저 따지기 보다는 ‘학문적이냐 실용적이냐.’ ‘케케묵은 것이냐 새로운 것이냐’ ‘인습적인 것이냐 과감한 것이냐’를 따지게 되어있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범속한 것의 압력에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니는지 너는 알아야 한다. 언젠가 내가 맡았던 환자는 골수 무신론자였는데, 대영 박물관에서 책 읽기를 즐겼지. 그런데 하루는 책을 읽고 있던 환자의 생각이 영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꼴이 보이더구나. 아차 하는 사이에 원수가 내 환자의 곁에 바짝 달라붙었던 게야.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20년 동안이나 쌓아 온 탑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때 이성을 잃고 논증으로 방어하려 들었다면 난 아마 완전히 끝장나고 말았을 걸. 하지만 내가 그런 바보짓을 할 리가 없지. 나는 그 즉시 내가 제일 만만하게 쥐고 흔들 수 있는 부분을 건드리면서, 점심을 좀 먹어야 할 때가 아니냐고 일러 주었다. 보아하니 원수가 즉시 반격에 나서서, 이 문제는 점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더구나. “중요하고말고 사실 이건 오전이 다 끝나가는 자투리 시간에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야.”라고 내가 맞장구치자 환자의 안색이 밝아지는 걸 보면 말이야. 이때를 놓칠세라 “점심 먹고 와서 개운한 머리로 다시 생각하자.”라고 얼른 덧붙이니까, 벌써 저만치 문 쪽으로 걸어가더라.


환자가 거리로 나섰을 때쯤에는 이미 전세가 내 쪽으로 확연히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석간신문이 나왔다고 외치는 신문팔이 소년과 거리를 지나가는 73번 버스를 보여주었지. 그리고 그가 계단을 다 내려서기도 전에, 머릿속에 굳건한 확신 하나를 단단히 심어 주었다.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서 책을 읽고 있을 때는 온갖 괴상망측한 생각이 다 들 수 있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 이 건강한 ‘실제의 삶’앞에 그 따위 관념들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확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