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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Lewis - 스크루테이프 편지 中

ToBeIsToChange 2006. 6. 2.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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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웜우드에게

인간은 양서류다. 반은 영이고, 반은 동물이지. 그러니까 인간은 영적존재로서 영원한 세계에 속해 있는 한편, 동물로서 유한한 시간 안에 살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의 영혼은 영원한 대상을 향하고 있지만 그 육체와 정욕과 상상력은 시시각각 변한다는 게야. 시간 안에 있다는 것은 곧 변한다는 뜻이니까.


따라서 인간이 불변성에 가장 가까이 가는 길은 바로 이 기복(起復)의 과정을 거치는 데 있다. 골짜기로 떨어졌다 꼭대기로 올라갔다 하면서 끊임없이 후퇴했다 복귀했다 해야 한단 말이지. 네가 환자를 자세히 관찰했다면, 그의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에 이러한 기복이 있다는 걸 알아챘을 게다. 일에 갖는 흥미도, 친구들을 향한 애정도, 몸의 욕구도 죄다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한, 인간은 육체적으로 풍성하고 활기차며 쉽게 감동하는 시기와 무감각하고 결핍된 시기를 번갈아 겪어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 네 환자가 겪고 있는 메마르고 무덤덤한 느낌은 네 분별머리 없는 착각처럼 네 솜씨 때문이 아니라, 그때 그때 잘 활용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불과하다 이 말씀이야.


 

이 현상을 최고로 잘 활용하려면, 원수가 이걸 어떻게 이용할까를 생각한 다음 그 반대를 택하면 된다. 원수가 인간 영혼 하나를 제 것으로 확보하기 위해 꼭대기보다 골짜기에 더 의존한다는 걸 알면 아마 좀 놀랄게다. 원수가 특히 아끼는 인간들은 그 누구보다 길고도 깊은 골짜기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 이유를 알겠느냐?


우리한테서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식량에 해당한다. 그러나 원수는 자신을 작게 복제해 놓은 이 혐오스러운 인간들로 우주를 우글우글 채울 생각을 정말로 하고 있다고. 즉, 우리가 원하는 건 키워서 잡아먹을 가축이지만, 그 작자가 원하는 건 처음엔 종으로 불렀다가 결국 아들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을 빨아들이고 싶어 하지만, 원수는 내뿜고 싶어 하지. 우리는 비어 있어 채워져야 하지만, 원수는 충만해서 넘쳐흐른다. 우리의 전쟁 목적은 저 아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다른 존재들을 모조리 삼켜 버리는 세상이지만, 원수가 바라는 건 원수 자신과 결합했으면서도 여전히 구별되는 존재들로 가득 찬 세상이야.  바로 이 지점에서 골짜기가 끼어든다. 원수는 피조물들이 제 힘으로 서게 내버려 둔다. 흥미는 다 사라지고 의무만 남았을 때에도 의지의 힘으로 감당해 낼 수 있게 하겠다는 속셈이지. 인간은 꼭대기에 있을 때보다 이렇게 골짜기에 처박혀 있을 때 오히려 그 작자가 원하는 종류의 피조물로 자라나는 게야. 그러니 이렇게 메마른 상태에서 올리는 기도야말로 원수를 가장 기쁘게 할 수밖에...


우리는 환자들을 밥상에 오를 식사거리로 생각하는 판이니, 끊임없는 유혹을 통해 질질 끌고와도 무방할 뿐 아니라, 그들의 의지를 방해하면 할수록 좋다. 하지만 원수는 우리가 인간을 악으로 유혹하듯이 미덕으로 유혹할 수는 없는 일이지. 제 바람대로 인간 스스로 걷도록 가르치려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야지 별 수 있겠느냐. 그러다가 넘어져도 계속 걷겠다는 의지만 보이면 그 작자는 좋아라 한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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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웜우드에게

골짜기가 우리 편에 제공해 주는 기회도 있다. 먼저, 내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인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운데 골짜기를 지나기는 시기에는 감각적 유혹, 특히나 성적 유혹이 매번 잘 먹혀든다. 꼭대기에 있을 때는 저항력도 최고로 높은 시기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불행히도 정욕을 일으키기에 좋은 건강과 활력은 일이나, 놀이, 생각, 무해한 오락에도 쉽게 이용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내면세계가 삭막하고 냉랭하고 공허할 때, 외려 이런 공격이 성공할 가능성이 큰 게야.


골짜기에 있을 때의 성욕은 꼭대기에 있을 때의 성욕과 질적으로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골짜기에 있을 때의 성욕은 인간들이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하는 들척지근한 현상으로 기울 가능성은 훨씬 적으면서도 성도착(性倒錯)에 빠질 가능성은 훨씬 크고, 종종 성적 욕구를 맥 풀리게 만들어 버리는 사랑의 부산물(관대하고 영적인 사랑)에 오염될 가능성은 훨씬 적지. 성욕도 육체의 다른 욕구들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착실한 술주정뱅이를 만들려면, 행복하고 느긋한 기분으로 친구들과 즐기고 있을 때 술을 권하기 보다는, 침체되고 지쳐 있을 때 일종의 진통제로 마시도록 밀어 붙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야. 


어떤 쾌락이든 건전하고 정상적이며 충만한 형태로 취급하는 건, 어떤 점에서 원수를 유리하게 하는 짓임을 잊지 말거라. 우리가 쾌락을 사용해 수많은 영혼을 포획했다는 건 나도 안다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쾌락은 원수의 발명품이지 우리의 발명품이 아니지 않는냐? 우리가 이용하는 방식은 진정한 쾌락은 감소시키고 그에 대한 갈망은 증대시키는 것이다.


환자에게 만사에 중용을 지키라고 말해 주거라. ‘종교는 지나치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믿게만 해 놓으면,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마음 푹 놓아도 좋아. 중용을 지키는 종교란 우리에게 무교나 마찬가지니까. 아니 무교보다 훨씬 즐겁지.


이제는 감이 좀 잡히는지? 참과 거짓이라는 명백한 대립항을 생각지 못하게 하거라. ‘이건 그저 하나의 단계일 뿐이야.’ ‘나도 다 거쳐 왔지.’하는 식의 교묘하고도 아리송한 표현들을 잘 활용하도록 하고, ‘성장기’라는 복된 단어도 잊지 말고 써먹도록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