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삶

故 한기택 고법부장판사

ToBeIsToChange 2006. 7. 21. 12:55

목숨 걸고 재판’하다 떠난 한기택 판사"

[동아일보]

《한기택(韓騎澤·사진)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가 7월 말 가족들과의 휴가 여행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는 생전에 “목숨 걸고 재판을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재판에 임하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법원의 인터넷 게시판에도 너무 일찍 가 버린 그를 기리는 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선배 동료 후배 판사들에게서 가장 많은 존경을 받아 온 것으로 알려진 한 판사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로 우리 시대 법과 사람과 세상을 비춰 본다. 동료 판사였던 강금실(康錦實) 전 법무부 장관의 추모 글도 소개한다.》

이별의 시간까지는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고 했던가.

7월 26일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6호실. 상복을 한 중년의 여인이 남편의 영정 앞에 섰다. 떠나는 남편에게 마지막 말을 해야 하는 순간. 그녀가 한 말은 모두 세 마디.

“여보, 사랑해요. 잘 알지?”

“여보, 미안해요.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서….”

“여보, 고마워요. 소중한 아이들을 주고 가서….”

이날 대화의 주인공은 한기택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와 그의 부인 이상연 씨. 부인 이 씨는 슬픔에 젖은 남편의 친구와 동료들을 위로하면서 눈물을 보이지 않다가 이 말을 하면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한 부장은 이틀 전 노모를 모시고 형제 가족들과 함께
말레이시아로 휴가를 떠났다가 심장마비로 숨졌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동료 판사들은 그들이 이별하는 순간, 비로소 그들의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됐다.

두 사람은 1977년 대학 1학년 때 만나 ‘1000번의 데이트’ 끝에 1985년 결혼했다. 젊었을 때 한 판사의 꿈은 좀 특이했다.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다. 이 씨는 한 판사가 이 꿈을 이뤘다고 말했다. 결혼 20년 동안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는 것.

이들의 사랑의 근거는 서로에 대한 존경이었다. 장례식 절차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부인 이 씨에게 고인의 동료 판사가 차를 태워주겠다고 하자 이 씨는 정중히 거절했다. “남편이 원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 한 판사는 올해 2월 차관급인 고등법원 부장으로 승진해 관용차를 제공받았지만 부인과 가족에게 ‘단 1초’도 차를 태워주지 않았다. 공직자의 도리에 어긋난다는 게 이유였다.

한 판사는 모든 걸 다 바쳐 오로지 재판에만 열중한 까닭에 후배들 사이에서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로 불렸다.

그가 한 판결들을 보면 그가 무엇에 목숨을 걸었는지 알 수 있다.
서울행정법원 시절 판결에는 사회적 소수자들이 받는 차별과 그들의 권익 보호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나타나 있다.

2003년 3월 법무부가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인 배우자에 대해 중국에 두고 온 성인 자녀의 한국 초청을 막는 것이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2002년 5월에는 선임병의 가혹행위로 자살한 육군 모 포병부대 이등병 엄모 씨에 대해 “가혹행위 때문에 목숨을 끊은 것은 직무수행과 관련이 깊다”며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반면 고위공직자나 정치인에 대해서는 엄격한 판결을 내렸다. 2003년 2월 고위공직자의 재산등록 때 해당 공직자의 직계 존·비속이 재산등록을 거부할 경우 거부 사유와 거부자의 이름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재산등록을 거부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국민이 감시하고 검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4월 재벌가의 딸이 결혼 축의금 2억1000만 원에 대해 부과된
증여세를 취소하라며 낸 소송에서 “증여세 부과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린 것도 화제를 낳았다.

한 판사는 올해 2월 동료와 후배 판사들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살 수도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진정한 판사로서의 삶이 시작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런 그를 부인 이 씨는 존경하고 사랑했다. 이 씨는 “20년을 살아오면서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로 사랑해 왔다”고 말했다.

부부끼리 절친한 사이인 이광범(李光範) 광주고등법원 부장판사의 부인 김매지(金梅枝) 씨는 “두 사람은 진정한 사랑과 존경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줬다”고 말했다.

김종훈(金宗勳) 변호사는 “떠난 그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 없이 살아야 할 우리가 불쌍하다”고 말했다.

이수형 기자 sooh@donga.com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보낸 추모의 글▼

한기택 부장님, 한 판사님, 한 형.

당신은 죽어서 그리움으로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살아서 우리에게 존재를 비추어 주는 빛의 역할을 하였고, 죽어서 그리움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영원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가고 저는 살아서 이렇게 부끄럽습니다. 살아서 이렇게 부끄럽다는 생각을 처음 해봅니다. 언제 보아도 호리호리하게 야윈 몸을 조금 흔드는 듯, 살짝 보조개가 들어가는 듯, 변함없는 미소 속에서 언제나 다름없던 차근차근하고 조용한 말씨로, 당신은 항상 거기에 그 자리에 있었어요.

우리가 가고 싶지만 차마 엄두가 안 나 못 가는 곳. 살아 있는 모든 시간, 살아 있는 모든 정열을 몰입하여 지극한 순결로 머물러 있는 곳. 거기에서 언제나 당신은 조용조용하게 우리에게 말하였고 몸소 보여 주었어요. 가장 치열한 정점에서 사는 것만이 진실이며 정답이라고요. 우리는 조금씩 비켜서 있었지요. 그러면서 당신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했지요. 이제 당신은 영원한, 영원히 닿기 어려운 빛으로 우리 삶을 쓰다듬어 줄 것인가요.

한 판사님, 한 형, 기택 씨.

살아 있는 것이 부끄럽네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요.

고뇌하고 방황하는 우리 모두에게 당신은 이제 영원한 그리움이 되었어요. 지금쯤 하느님 앞에서 새로운 영혼의 삶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당신이 함께하였던 당신의 가족, 친구들, 우리 모두에게 남은 삶의 길을 이끌어 줄 준비를 하고 계신가요.

당신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올해 2월 고등법원 부장승진 축하모임 자리였어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곤소곤 저에게 말하였어요. “영세 받은 것 축하한다”고. “이승은 아무래도 행복한 곳은 아니다”고. 그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당신 말이었어요. 이승은 아무래도 행복한 곳은 아니에요. 그러나 그리움이 된 당신을 따라 우리도 최선의 길을 찾아 노력할게요. 다시 만날 날까지. 그날까지 새로운 그곳에서 행복한 나날 꾸리고 있으세요. 다시 만날 날까지….
|크게 | 작게


 

 

대전고등법원 형사1부 한기택 부장판사(46)가  여름 휴가중 숨져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25일 대전고법에 따르면 지난 23일 가족과 함께 코타키나바루로 여름 휴가를 떠난 한 부장판사는 24일 오전 휴양지 인근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다 심장마 비로 숨졌다.

유가족들은 한 부장판사의 유해를 26일 오전 서울 삼성병원으로 옮겨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를 예정이다.

한 부장판사는 서울 출생으로 영동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1981년 사법시험에 합격(23회), 법조계에 입문했으며 1994년 서울고법 판사, 96년 대법원 재판연 구관, 2002년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등을 거쳐 2005년부터 대전고법 부장판사로 재직해왔다.

특히 고인은 `우리법연구회' 회원으로 93년도 사법민주화를 위한 법관회의 설치 등 사법부내 굵직굵직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진보.개혁 성향의 목소리를 내왔다

 

 

<'목숨 걸고 재판한 판사' 한기택의 삶>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가장 판사다운 판사,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 매사에 철저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불렸던 고 한기택 판사.

대전고법 부장판사로 재직했던 그는 2005년 7월 가족과 함께 한 휴가여행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당시 나이는 46세. 그리 길지 않은 그의 삶을 아쉬워하며 '한기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후 1주기를 맞아 추모집 '판사 한기택'을 엮어 펴냈다.

판사로서 그는 인권을 강조한 판결을 내렸다. 사회 소수자들이 받는 차별과 권익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는 평가다.

선임병의 가혹행위로 자살한 육군 부대 이등병에 대해 직무수행과 관련이 깊다며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고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인 배우자가 중국에 두고 온 성인 자녀를 한국에 초청하는 것을 법무부가 막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반면 고위공무원 등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판결했다. 고위공직자 재산등록 때 직계 존비속이 재산등록을 거부할 경우 거부 사유와 거부자의 이름을 공개하라고 판결했으며 재벌가 자녀의 결혼축의금에
증여세가 부과된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해 화제가 됐다.

그는 중견 법관이 된 뒤 "목숨 걸고 재판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할 정도로 다른 사람에 대한 재판을 자신의 목숨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1988년 '2차 사법 파동' 당시에는 사법부 수뇌부의 개편을 촉구하는 성명과 서명을 주도하는 등 재직 중 줄곧 사법개혁에 앞장서 주목을 받았다.

사법 파동에 뜻을 함께 했던 판사들은 이후 '우리법연구회'를 만들었다. 고인은 연구회에 "나는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내가 뭐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순간 남들이 나를 죽었다고 보건 말건 진정한 판사로서의 나의 삶이 시작될 것으로 믿습니다"는 글을 남겼다.

화 한번 내지 않는 남편이자 성실한 아빠였지만 가정에서도 일과 관련해서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아내 이상연씨는, 남편이 얼떨결에 법원상담 몇마디 해준 동사무소 직원이 주스 2병을 들고 오자 안받겠다며 싸우다 시피 해서 돌려보냈다고 전한다.

추모집에는 고인이 중학교 시절부터 써 왔다는 일기,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와 함께 박시환 대법관과 이광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연구실장 등의 추모글이 실렸다.

궁리. 244쪽. 1만원.

jsk@yna.co.kr

 

 

 

주스 한병도 고사하던 꼿꼿함 여전한가요


 
[한겨레] 지리한 장맛비가 온 나라를 물바다로 만들고 있습니다. 시커먼 먹구름 사이에서 파란 하늘과 햇빛을 갈망하는데도 말입니다. 기택형이 1년 전 오늘 말레이지아 해변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뒤 나라 안팎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작금의 법조비리와 사법부 독립에 대한 열망, 그에 대한 저항세력의 발흥 등, 어둡고 쓸쓸한 시대에 법조 3륜의 존경과 추앙을 받은 ‘임기추상 대인춘풍’(臨己秋霜 對人春風)의 전형인 형의 체취가 더욱 그립습니다.

70년대 영동고교 시절 학업과 특별활동을 병행하면서도 탁월한 업적을 쌓아가셨습니다. 방송반 활동이 꽤나 시간과 정열을 빼앗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에게 솔선수범하며 밤새워 DJ, 엔지니어, PD 일을 도맡아 1인3역을 해냈습니다. 방송제 팜플렛을 서울 소재 각 학교에 전달하기 위해 게으른 후배들 데리고 다니면서 초청장 돌린 일, 학교 신문에 형의 신당동 자택 함석 처마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대한 느낌을 멋들어지게 풀어내어 기고한 글 등등…. 그 시절이 자꾸만 그리워집니다. 진정한 인문주의자이신 형의 후배 사랑은 화천에서 군 법무관시절, 아마 신혼 초였을 겁니다. 친구 면회 뒤 서울로 상경 못하고 꽁꽁 언 몸으로 형의 단칸 관사에 찾아간 후배들을 버선발로 뛰어나와 따뜻이 감싸안던 형이 보고싶습니다. 언제나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엄격했던 형. 법으로부터 소외된 이웃 편에서 재판하던 형. 정의롭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신념을 몸으로 보여준 형.

동사무소 직원에게 얼떨결에 법무상담을 해주자 그 직원이 주스 2병을 들고 오자 극구 사양하며 돌려보내던 형. 고등법원 관용차를 제공 받았지만 형수님과 가족은 ‘단 1초’도 차에 태우지 않은 형. 반면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에 대해서는 엄격한 판결을 내려 서민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던 형. 2차 사법파동 당시 선비 외모와는 달리 강골의 기개로 사법부 수뇌부 개편을 촉구하는 성명과 서명을 주도했던 형. 당시 뜻을 같이한 동료 판사들과 ‘우리법연구회’를 만들어 사법부 개혁에 앞장섰습니다.

사법파동때 수뇌부 개편 촉구성명 주도
공직자·정치인 엄격한 판결 ‘강골 기개’


형을 기리기 위해 영동고교 총동창회는 지난 1월 ‘제1회 자랑스러운 영동인’으로 선정했습니다. 사법부 개혁과 법조문화 개선에 앞장선 형에 대한 상일 뿐 아니라 인문주의자로서 인간에 대한 가장 진솔된
휴머니즘을 베푼 형에 대한 상이라 믿습니다.

기택이 형!

이제 정말로 헤어져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마음 속에 내내 미련과 아쉬움으로 떠나보내지 못한 형을 보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승에서의 사랑을 완성 못한 형수님과 알토란 같은 슬하 2남1녀에게도 신경쓰는 후배가 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기택형! 그동안 좋은 인연이었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편히 잠드세요.

이 글은 지난해 7월21일 별세한 고 한기택 판사 1주기를 맞아 고교 1년 후배로 30년 가까이 우정을 나눈 오권수(47·신도SDR 영업국장) 독자께서 보내오셨습니다.

<< 온라인미디어의 새로운 시작. 인터넷한겨레가 바꿔갑니다. >>

 

 

 

▼故 한기택 부장판사는▼

△1959년 2월 서울 출생. 향년 46세

△1977년 서울 영동고 졸업

△1981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제23회 사법시험 합격

△1983년 사법연수원 13기 수료

△1986년 서울민사지법 판사

△1994년 서울고법 판사

△1996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2002년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

△2005년 대전고법 부장판사

 

 

“故 한기택, 목숨걸고 재판한 당신이 그립습니다”

 



1992년 미국 연수 시절의 한기택판사.

지독하리만치 성실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질책했던 고 한기택 판사가 가족과 함께 한 휴가여행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한 지 1년이 흘렀다. 당시 그의 나이 46세.

현직 고법부장판사의 금품 수수 의혹이 불거지고 젊은 판사들까지 지역유지들로부터 술접대를 받는 등 사법부의 도덕적 불감증이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지금 평생을 ‘법관의 표상’으로 살다간 그의 죽음은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판사 한기택’은 법원에서만 존재하는 이름이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누구보다 열심히 성당에 다녔지만 성당 사람들도 그가 판사인지 알지 못했다.

한판사는 개인적으로 법률상담을 결코 하지 않았다고 부인 이상연씨는 기억한다. 아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얼떨결에 몇마디 해줬다가 지인이 감사의 표시로 들고온
델몬트 주스 2병을 승강이끝에 돌려보낼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했다.

그는 혹시 누군가 ‘당신이 과연 남을 재판할 자격이 있느냐’고 물어오지 않을까 늘 두려워했다.

2005년 2월 차관급인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해 받은 관용차를 부인과 자녀들에게 단 ‘1초’도 태워주지 않은 것도 그의 원칙주의적인 면모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는 누구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기보다 자성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키며 세상의 불합리와 싸우는 스타일이었다.

김용철 대법원장의 사퇴를 이끌어낸 1988년 2차 사법파동때 400여명의 판사 서명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온건’과 ‘자성’으로 어우러진 그의 성명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판결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했다. 10분 단위로 재판을 진행했고 사건 당사자들이 다 출석해도 정해진 시간 전에 선고를 하는 법이 없었다. 판결문 작성과 재판은 그의 표현대로 ‘목숨을 걸고’ 진행했다.

그의 판결은 사회 소수자들이 받는 차별과 권익 보호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는 평가다. 반면 고위공무원 등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양형은 가차없었다.

그를 먼저 떠나보낸 ‘한기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사후 1주기를 맞아 추모집 ‘판사 한기택’을 펴냈다. 책에는 고인이 중학교 시절부터 써 왔다는 일기,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와 함께 박시환 대법관과 이광범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연구실장 등의 추모글이 실렸다.

〈권재현기자 jaynews@kyunghyang.com〉

 

 

 

 

 

 

 

 

 

2006년 7월 21일 (금) 07:07   세계일보

"법관들이여 목숨 걸고 재판하라"



 
남편이 차관급인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해 관용차를 배정받았으나 한 번도 동승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부인은 급기야 “동네 한 바퀴만 돌아보자”고 청했다. 남편 반응은 단호한 거절. 판사는 자녀도 차에 태운 적이 없었다. 판사의 장례식때 동료 판사가 고인의 부인에게 장지로 가는 길에 관용차를 타도록 권했으나 부인은 “남편이 원하지 않을 것 같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해 46세로 심장마비로 타계한 고 한기택 판사의 일화다. 고인의 서거 1주기를 맞아 그 삶을 기리는 추모집 ‘판사 한기택’(궁리 발행)이 20일 출간돼 법조브로커 파동으로 어수선한 세태를 새삼 곱씹게 하고 있다.



고인은 공사가 분명했다. 그는 골프 대신 등산을 즐겼고 법원 울타리만 벗어나면 서민의 삶에 녹아들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는데도 그와 가까웠던 마르셀 수녀는 “‘한 크리스토폴’(고인의 세례명)로만 알았다. 판사였다는 사실은 타계 후에야 비로소 알았다”고 회고했다.

판사 한기택에게 중요한 것은 공사 구분만이 아니었다. 인권과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 또한 소중했다. 고인은 선임병의 가혹행위로 자살한 이등병에 대해 직무수행과 관련이 깊다며 국가유공자로 인정했고, 안마사 자격 논란에 대해서는 ‘
직업선택의 자유가 시각장애인의 생존권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기득권층에 대해서는 엄정했다. 고위공직자 재산등록 때 직계 존·비속이 재산등록을 거부할 경우 거부 사유와 이름을 공개토록 판결했고, 재벌가 결혼축의금에 대한
증여세 부과 시비에선 세정당국의 손을 들어줬다.

정성수 기자

hul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