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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신앙의 스승 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
C.S. Lewis 의 저서 "예기치 못한 기쁨"이다.
루이스는 한마디로 나에게 시원함을 주는 존재이다.
내가 정직하게 의심하고, 답답해 하며 궁금해 한 모든 것들에 대해 그는 시원한 설명을 해주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 책의 전체적인 흐름을 요약하는 형식을 빌려 내 맘데로 정리한 것이다.
Surprised by Joy[C.S. Lewis] --- 기쁨에 놀란 후, 기쁨의 근원을 찾아내다 --- 2003. 8.15
"루이스가 그의 전 인생을 통해서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그 진리를 나는 이미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축복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된 것, 이것을 나는 '은혜'라고 부른다. "
1. 어린 시절에 "장난감 동산"과 "다람쥐 넛킨"이라는 제목의 책, 그리고 "올라프 왕의 전설"이라는 시에 의해 무엇인가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 갈망의 특징은 어떤 만족감보다 그 갈망 자체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행복과 쾌락과는 엄격히 구분된 것으로 끝내 충족되지 않는 갈망이다. (루이스는 이것을 갈망을 향한 갈망, 즉 "기쁨"이라고 불렀다.)
2. 신비학의 모호함, 단순히 추론하는 성향이 번져나가 믿음이라는 것을 버리게 되었다. 루이스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멍에를 씌우면서 신앙을 버리게된 상황은 다음과 같다.
말로만 기도하지 말고 그 내용에 대해 잘 생각해 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루이스가 "아멘"하고 기도를 마치자마자 잘못된 양심(율법, 또는 수다쟁이)이 끼어 들었다. "정말 니 기도에 대해 진짜 생각해 본거야?" 루이스의 대답은 언제나 "아니"였다. 그래서 그 기도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어떤 규칙을 정해 버렸다. 그것은 기도할 때 생생한 상상과 감동이 없이는 단 한 구절도 넘기지 않겠다는, 즉 "깨달음" 없는 기도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무엇인가를 끌어내려고 애를 쓰는 잘못된 생각이었다. 루이스는 자주 절망감에 사로잡혀 기도에 잘못된 의무를 부여함으로써 혹독한 무게를 지게 되었다. (루이스는 내 힘으로 기도제목을 "달성"하려고 했으며, 하나님을 도외시한 채 내 마음상태에만 신경을 썼고, 스스로 그런 마음을 만들어 내고자 애쓰는 잘못은 범한 것이다.)
또 신앙을 버리게 된 이유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하등 다른 점이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종교란 대개
헛소리를 뒤섞어 놓은 것에 불과한데, 다행히도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는 정확하게 진리를 말하는 예외적인 경우"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입장이다. 루이스가 볼 때 종교란, 일반적으로 자연스럽게 발달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혹하기 쉬운 일종의 헛소리였다. 그런 종교가 천 가지나
난무하는 복판에서, 우리 종교만 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천 한 번째 있다고 해서 다른 종교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루이스에게는 기독교를 따로
취급할 용의가 없었다.
3.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루이스는 예전의 느꼈던 "전율(기쁨)"을 되찾겠다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 후 루이스는 상상의 삶(기쁨을 얻으려는 몸부림과 사고과정)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했다.
첫째, 루이스가 원하는 것은 "전율"로서 스스로의 마음상태라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갈망이라는 것은 전율 그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바깥의 것을 갈망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둘째, 전율(기쁨)이라는 마음의 상태를 목표로 그 상태를 만들어 내려고 애쓴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 상태를 다시 누리는 것"이 지상목표가 되었다.
4. 자연이라는 대상이 스스로 존재하기를 바랬지만 그 바람을 포기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주 전체는 결국 정신적인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절대정신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 우리의 추론적 사고는 '껍데기'의 차원에서 겉돌고 있을 뿐, '실제'는 당연히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하게 드러났다. '실제'는 당연히 절대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신은 아닐지라도 절대자를 믿게 되었다.
5. 루이스의 맞수(하나님)는 마지막 몇 수를 두기 시작하셨다. 그 첫 수는 "새로운 외양(사고의 영역을 확장하는 세련된 학풍)"을 걷어치우게 했다. 두 번째 수는 "향유(메타인지Ⅰ)"와 "관조(메타인지 Ⅱ)"로 사고하는 방법에 대한 오류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환경을 통해서 들어온 정보는 메타인지Ⅰ에 의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이 때 사고의 대상이 사고의 수단에 의해서 정리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학에서 "주변 사물"이라는 사고의 대상을 "도형(Ⅰ)"이라는 사고의 수단을 가지고 파악하게 된다. 그 후에는 사고의 수단이었던 "도형"이 사고의 대상이 되고, "성질(메타인지Ⅱ)"이라는 사고의 수단으로 도형을 파악하게 된다.
그런데 내부 활동에 대해서는 향유와 관조가 별개의 행위가 된다. 우리는 희망하는 동시에 희망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희망이란 희망하는 대상 바라보는 것인데, 희망 자체로 시선을 돌려버리면 그 대상을 바라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향유와
관조는 현대에 아주 세련된 사고수단으로서 중요시되고 있지만, 우리 내부의 활동에 대한 향유와 관조는 별개의 행위인 것이다.) 루이스는 스스로
느꼈던 갈망이 "진정한 기쁨"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정신적인 흔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즉, 기쁨의 이미지를 묵상한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사고의 마지막은 "누가 내 갈망의 대상이냐?"는 물음이었다. 그 대상은 순전히 객관적인 존재임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6. 세 번째 수는 기쁨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갖게 된 일이었다. 유한한 인간은 과학의 관점에서 보아도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자'의 껍데기인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면 완전한 실체인 절대자에게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된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기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7. 루이스는 이때까지도 '절대자'를 명확히 규정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무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인지, 초자연적인 정신, 다시 말해서 인격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햄릿이 셰익스피어를 만날 수 없듯이 루이스도 절대자를 만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이스는 곧 자신이 무언가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햄릿이 주도해서는 셰익스피어를 만날 수 없지만, 셰익스피어는 극 속에 등장해서 햄릿과 대화하는 장면을 쓸 수 있다(성육신). 하나님은 루이스를 계속적으로 찾아와서 다만 이렇게만 말씀하셨을 뿐이었다. "나는 나다." 루이스는 그가 이성적인 존재인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지만 승복할 것을 계속적으로 요구받았다. 하나님은 루이스의 전부를 요구하셨다. 루이스는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그분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꾸준히 다가오시는 것을 느꼈다. 루이스는 사실 두려워했던 것이다. 1929년 여름, 루이스는 드디어 항복을 했고,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루이스는 탕자가 마지막 장면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도망갈 기회를 찾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래도 '군대(귀신)'와도 같았던 자신은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꾸준한 강요는 루이스를 해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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