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이재철 목사님 참으로 신실하게 감상편 中

ToBeIsToChange 2006. 6. 1. 19:23

 

"신앙이란 신실이고, 신실이란 본질에의 신실함이다."

지정학적으로 유럽의 중심인 스위스 제네바에서 생활하던 2년 내내, 나는 본질적인 것들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 역사는 있지만 말씀의 역사는 없고, 기독교 문화는 융성하되 사람이 거듭나는 생명은 실종되고, 예배당은 무수하나 신자는 사라지고, 신학은 건재하지만 신앙은 부재하며, 인간은 실존하나 하나님은 부정되는 유럽의 한가운데에서 말이다. 그 속에서 나는 대체 하나님의 말씀이 내겐 어떠한 의미인지, 믿음과 구원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를 숙고치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얻은 지극히 간단한 결론이 있었다. 신앙이란 신실이고, 신실이란 본질에의 신실함이란 것이다,

- '책머리에'중에서

 

 

내일을 위해 자신의 바탕을 닦고 있는 청년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심령이 오염된 절대다수가 아니라 신실하게 깨어 있는 소수를 통해 인류의 미래를 늘 새롭게 하시며, 신실한 중심은 오늘, 청년의 때부터 길들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책머리에’ 중에서

지난 세월의 결과가 현재 나의 모습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진실되이 살아온 자의 지금 언행이 불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짓되이 살아온 자의 현재 눈빛이 의로울 수도 없을 것이다. 인생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를 스쳐 지나가고 있는 1초1초의 축적이 곧 인생이다. 33쪽. ‘말씀-그 절대성’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한 줌의 흙에 지나지 않을, 바로 그대 자신을 위함이다. 그렇기에 청년의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 더 큰 지혜는 없다. 70쪽. ‘말씀-그 절대성’

과거의 하나님만 믿으려는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 없다. 어제의 하나님께서는 오늘 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계시며, 내일 또한 나의 하나님이실 것이다. 구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언제나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참된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을 위해 빚으시는 내일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114쪽. ‘믿음-그 완전성’

유한한 인간이 세상의 것을 배경으로 삼으면, 그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인생을 동시에 망치고 죽이는 짓이다. 이 세상의 것치고 소멸의 과정에 있지 않은 것이 없는 까닭이다. 유한한 인간의 배경이 될 수 있는 분은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뿐이시다. 그분을 배경으로 삼을 때에만 자신도 살고 자신의 일도 절대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212쪽. ‘구원-그 영원성’

거짓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구별하려 하기 전에, 거짓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라 여겨진다면 왜 거짓말을 해야 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라. 아무리 그럴 듯한 명분이라도 그 거짓의 궁극적 목적이 나의 돈주머니를 위한 것이라면, 칼로 무를 자르듯 단호히 거짓을 배격하라. 그렇지 않을 경우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거짓의 대가를 치르게 하실 것이다.
243쪽. ‘삶-그 현장성’

그대들의 삶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땅 끝의 사람들이 건져지고 있는지, 그대 평생토록 알지 못하고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날, 주님 앞에서는 모든 것을 확연하게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어떤 경우에도 그대들이 진정한 갈릴리 사람―참으로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야 할 이유이다. 그대들의 삶의 승패는 이 땅에서가 아니라, 그날, 하나님 앞에서 가려지는 까닭이다.
277쪽. ‘삶-그 현장성’

【Off The Record】저자 편집부 방문 사건


봄 기운이 가득하던 어느 날 편집부에 저자가 찾아왔다. 손에는 초교지와 가지런하게 뭔가를 정리한 종이 한 장을 가지고서 말이다. 홍성사 3층 서재에서 집필하시는 까닭에 늘 뵙는 얼굴이지만 저자로 만나는 얼굴은 또 달랐다.


저자는 편집부 직원들에게 책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려고 방문했는데, 그걸 종이에 적어온 것이었다. 하나같이 새겨야할 것들이었지만 그중 참 인상적인 것이 있어 나누고 싶다.
저자의 글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줄임이다. 예를 들면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하는 표현을 저자는 ‘숙고치 않을 수 없었다’는 식으로 쓴다. 편집부에서는 어법상의 문제로 초벌 과정에서 일부를 수정했다. 그런데 저자가 놀랍게도 어디가 고쳐졌는지 다 표시해 와서는 자기의 운율을 살려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 외의 부분도 언급하면서, 책 내용은 저자에게 책임이 있다며 의도가 드러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엄격한 글쓰기를 하는 저자의 방문은, 편집을 할 때 자꾸만 글을 조정하고픈 유혹에 빠지는 내게 일침을 가한 동시에 작은 것 하나를 고칠 때에라도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편집하는 편집자가 되어야 한다는 경각심을 안겨 주었다. 동시에 자신의 글에 책임질 줄 아는 저자를 만난 기쁨이 있는 시간이었다. 예기치 못한 저자의 방문은 이렇듯 편집자로서 수많은 생각과 마음들이 오가게끔 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김재홍] 참으로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라-참으로 신실하게
2006-04-25 17:28:48 [수정|닫기]블로그 담기

개신교 성직자인 이재철 목사는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매듭짓기'등으로 실천을 강조하는 내용의 책들을 써오고 있는 분이다.

 

성서에 대한 해박하면서도 깊이있는 묵상에 근거한 그분의 글을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글에 몰입하게 된다.실제로 필자는 이 목사님의 설교집중 하나인 '참으로 신실하게'를 서점에서 사오자마자 금방 다 읽어버렸을 정도로 그분의 글을 좋아한다.

 

눈을 떼기 힘들 정도로 청중들을 집중시키는 그의 저술 능력은 성공회 평신도인 필자로 하여금 종파를 초월하여 몰두하게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신실하게'는 이 목사가 장로교 선교사 자격으로 스위스 한인교회에서 3년간 목회하면서 청년들에게 했던 설교를 요약한 책이다.

 

주요 주제는 믿음의 실천과 하느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섭리를 믿는 믿음이다.

특히,실천적 설교는 개신교가 비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점을 생각해본다면 꼭 필요한 설교라고 생각한다.물론 개인의 신앙윤리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지만,직업윤리,정직함,성서의 가르침의 실천을 외치는 그의 설교는 듣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삶속의 질곡들을 만나고 있는 그리스도인 청년들에게 하느님의 섭리를 믿으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상경(上京)이라는 삶의 질곡을 너무 일찍 만난 그로서는,청년실업,가난등 험난한 질곡으로 힘들어하는 청년들에게 위로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실제로 '청년아,울더라도 뿌려야 한다.'에서도 역사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믿으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형식에 얽매이지 말 것을 말하는 내용의 설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의 자유를 느끼게 한다.그는 침례교 목사님과 장로교 목사님이 침례냐 세례냐로 티격하는 문제를 예로 들면서, 침례냐,세례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세례를 통한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지,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조너선 스위프트가 걸리버여행기에서 달걀을 깨는 방향문제로 다투는 소인국 사람들을 통해 풍자할만큼 형식에 얽매이는 개신교 형제들에게 좋은 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옥에 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소 심각할 수도 있는 결점도 보인다.

 

우선 성서해석과 용어선택에서 문제들이 있다.

 

이를테면 그는 출애굽 설화(說話)를 해석하면서, 모세가 이드로에게 간청해서 같이 동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하지만, 공동번역성서-1977년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같이 번역한 성서-와 한글개역판 모두 이드로가 모세에게 같이 살자고 했다고 말한다.

뭐, 모세에게 종교적 영향을 주는 인물인 미디안 사제 이드로와 만나게 되었다는 설화내용를 편집한 편집자의 의도가 중요하지,누가 같이 살자고 했는지는 중요한게 아니지만 말이다.

 

또한 성서고고학적으로 십자가형을 집행할때는 손목(팔목)과 발 뒤꿈치-아마 발목을 포개서 못을 박았을 것이다.-에 못을 쳤다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저자는 그리스도가 손과 발에 못을 박혔다고 주장한다.

 

프롤로그에서도 성공회에는 목사라는 성직이 없고,부제/사제/주교의 삼품 성직이 있음에도, 존 웨슬리를 성공회의 목사(?)로 잘못 소개하고 있다. 성공회 신자나 성공회에 대해 아는 분이 그의 글을 읽었다면, '웨슬리 신부가 맞는데..?'라고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필자의 소견에는 저자가 논지를 주장하면서 잘못된 정보나 용어에 근거한 무리한 해석을 한 것 같다.실제로 성공회 평신도인 필자가 보기에도 개신교 목사님들중에는 잘못된 정보를 주장하면서 무리하게 논지를 주장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이재철 목사도 그러한 실수를 하고 있다.

 

물론, 필자가 이러한 비평을 하는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개신교 목사님들 중에서 그러한 실수를 하는 분들이 많이 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 목사의 실수를 보면서 너무 은혜받음에 치중한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