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기 - 가장 혐오스러운 악덕
시기는 언제나 자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사실에 근거한 비난, 혹은 사실에 가장 근접한 비난을 제기한다. 그것이 상처가 더 깊다.
‘개가 개를 먹는’ 행태, ‘적자생존’이라는 살벌한 환경이 지옥을 지배한다고 루이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지옥은 지상에 수많은 전초기지를 배치하고 있다. “모두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두의 수치, 하락, 파멸을 원한다. 모두가 비밀보고, 위장 동맹, 배신의 전문가들이다”
시기는 다른 사람들이 잘되는 것을 한탄한다. 다른 누군가 성공을 누리면 시기는 성난 방울뱀처럼 대가리를 추켜세운다. 우리가 실패하면 시기는 우리를 속삭여 우리 스스로를 연민하고 불퉁거리게 한다. 그래서 불만이 가득하게 된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분노하며, 남들에게 즐거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신을 물어뜯게 된다.
시기는 이글거리는 석탄처럼, 때가 되면, 스스로를 태워 없앤다. 존 크리소스톰이 말한바, “시기는, 의복을 갉아먹는 좀벌레 처럼, 사람을 갉아먹는다,”
자신이 어떤 대가를 치르든 경쟁자들을 해롭게 하는 것, 시기의 본질은 이와 같다.
헬무트 쉐엑이 주장한 대로, ‘시기하는 사람’은 “탐나는 물건을 갖고 싶어하지도, 그것을 즐겨하지도 않고” 다만 다른 누군가 그것을 갖는다는 사실이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배를 타고 싶어 한 적이 없음에도 다른 누군가 배를 가졌다는 것이 괴로워 끙끙 앓는다.” 다른 사람들의 재능이나 소유물 혹은 관계(어머니나 남편의 애정과 같은)를 자신도 갖고 싶어 하는 단순한 시샘과는 달리, 시기는 다른 누군가 어떤 것-고급 자동차든, 명예로운 지위든, 양복이든, 혹은 신문에 잠깐 나왔든-을 갖는다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바, 시기심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좋은 것이 우리의 좋은 것보다 뛰어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좋은 것을 두고 통탄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이 시기이며, 언제나 죄악이다.”
한편, 시기심이 가득한 사람은 감독이나 어떤 사람이 그 직무를 잘 수행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끌어내리고 싶어 하며 그들의 추락이 자신의 승진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시기는, 리바운드 위치를 점령하기 위해 상대 선수를 밀쳐내는 농구선수처럼, 상대방을 불리한 상황으로 몰아낸다.
결과적으로 시기는 그 뿌리를 교만에 두고, 증오의 꽃을 피워 올린다. ‘악의적인 기쁨’이라는 뜻의 독일어 쉬아덴프로이데에서 시기의 본질은 선명히 드러난다. 쉬아데프로이데는 “인간본성의 가장 나쁜 특징‘이라고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선언했다. 그는 이 시기의 독약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통찰했다. 첫 번째 부류는 나쁜 사람들을 칭찬하는 자들이고(이들은 나쁜 행위를 저지를 사람들을 졸지에 유명인사로 만들어 버린다). 두 번째 부류는 선한 일을 한 사람들에 대한 칭찬을 보류하는 자들이다(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칭찬할 경우 자신들이 칭찬을 못 받을까 두려워한다).
시기는 교만이라는 동전의 뒷면이여, 평생을 같이하는 나쁜 친구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시기는 우월감과 열등감이라는 두 감정 모두와 손잡고 걷는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모든 경쟁자들에게 그 점을 과시한다. 반면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연민하고, 차이를 없애려고 애쓰며, 빈번히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드러냄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축소시키려 한다.
그럼에도 교만함 사람들과는 달리, 시기심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시기는 단 한번도 기립박수 같은 것을 먼저 제안해 보지 않는 악덕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시기심이 있음을 느끼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시기심을 보며, 시기가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악 중 하나라는 중세적 견해에 대체적으로 공감하기까지 하며, 시기를 ‘더러운 죄’라고, ‘일체의 미덕과 선함에 반대하기’ 때문에 아마도 ‘존재하는 가장 나쁜 죄’라고 부른 초서 목사의 입장에도 동의한다.
“ 사람들의 영혼에 뿌리 내린 시기심보다 해로운 악덕은 없다.”(가이사랴의 바실)
시기하는 사람은 결코 기쁨을 모른다. 단단하고 행복한 가정을 보고, 칼처럼 가슴을 찌르는 것, 시기하는 자의 병과 고통을 가중시키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없다. 시기는, 당사자가 자신의 울화를 영혼의 시궁창에 처박아 감추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드러날 수 없는 태도이며, “그의 활력을 갉아먹고 결국 그를 다 태워 없애는 질병”이다. 게다가 “시기는 가장 미개한 형태의 증오이다.”라고 바실은 말한다.
시기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적은 것이 돌아가기를 원한다. 시기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이들의 행운에 분노하고, 그들의 상실과 고통으로 괴로워할 때 즐거워하며, 그들이 은총에서 멀어지거나 실패할 때 득의의 표정을 짓는다.
시기에는 긍정적인 면 혹은 자긍심이라 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그래서 시기하면 할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해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겨냥한 화살이 우리 자신에게 와서 박힌다는 아이러니가 시기이다.
C. S 루이스는 빈번히 ‘현대 세계’와 다투면서, “평등이 의약품이나 안전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이상으로 취급된다면, 우리는 모든 우월성을 증오하는 발육부진의 시기심 같은 것을 키우기 시작한다”고 공격한다. 지나치게 많은 영향력 있는 인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평등주의 및 유토피아 이상에 전념한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학문적으로 세공된 가면들-피압박자들에 대한 동정, ‘소외자들’에 대한 지원,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조-로 시기심을 위장해왔다. ‘절대 평등의 사회에서는’ 모든 사회적 문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루이스가 언급한 대로 우리는, 시기심을 일개인이 아니라 집단이 표출한다 해서 거기에 동조할 수 없다. ‘자본가들’ 혹은 ‘백인들’ 혹은 ‘이성 반대자들’과 같은 특정 집단을 전복하려는 행위는 우리의 상사가 직위를 박탈당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다를 바 없이 악하다.
루이스가 역설한대로 “정치적 장에서나 외쳐지던 평등이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내부 세례로 까지 확대된다면, 인간의 본성은 그렇게 균일한 평들을 영구히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평등의 옷을 입자, 그러나 매일 밤 그 옷을 벗자”
헬무트 쉐엑은 ‘정치에는’ 부자에게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줌으로써 ‘도달할 수 없는 평등’을 약속하는 교활한 ‘시기심의 호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나쁜 놈한테 빼앗아 나쁜 놈한테 준다”는 옛말이 아직도 활개치고 있다.
시기는 실제적인 필요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오로지 비교우위만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모두가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더 많이 가진 자와 비교하고, 모든 불평들의 제거를 갈망한다. 이러한 갈망은 충족될 수 없는 것이므로, 더 많은 권력을 얻고자 더 많은 특정 이익집단들이 출현하게 된다.
C. S. 루이스는 자신과 깊이 관련된 한 분야에서, 수준 차이를 제거하고 모든 학생들을 똑같이 대함으로써 “사악한 욕망을 채우고 시기심을 만족”시키려는 민주적 평등주의의 영향력을 염려했다. 학생들의 지능과 능력은 언제나 우열이 있는 이상, 그 어떤 평준화의 노력도 차이를 없앨 수 없다.
루이스가 1940년대에 염려하던 것이 오늘날 표준적인 정책이 되었다. 이제 학교는 자부심을 전공하는 곳이다. 교회는 자기 개발을 권하고, ‘성장 그룹’을 지원하며, 아무도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 다만 자신을 아프게 한 다른 누군가를 대상으로 삼는 치유세미나를 개최한다.
불평하는 자들은 거의 언제나 불공평을 두고 분노를 터뜨린다. 불공평에 대한 분노에서 시기심이 분출한다. 시기는 차이를 부당한 것으로, 인간이 만든 불공평으로 해석한다.
C. S 루이스가 볼 때, 성 정체성에 대한 자기연민과 적개심은 시기심과 현실 부정의 태도를 위장하기 위해서 교묘히 동원된 수단이다.
급진적 페니미즘 이데올로기는, 성의 차이라는 현실을 부정하므로, 하나님의 계획을 침해하고, 결혼 관계에 존재하는 남성과 여성의 규범적인 역할을 무너뜨린다고 염려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우리의 본성은 각기 다른 창조의 역할을 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루이스는 주장했다. “우리의 혼인 규범 내에서, 원하는 만큼 더 많이 더 훌륭하게 평등하라. 그러나 어떤 차원에서는 불평등에 대한 동의가, 아니 불평등의 즐거움이 성적인(erotic) 필수품이다.”
남성과 여성은 모두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 - 연합을 균형 있게 하는 여성 남성 각각의 고유한 특징-을 인정함으로써 항구적인 기쁨을 얻고, 시기심 및 그로 인한 끝없는 경쟁과는 상반되는 태도를 서로에게 보여줌으로써 즐거움을 누린다.
루이스는 어떤 이론을 제창하는 것보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데서만 스스로 기쁨을 찾았다. 자신의 남자에게 복종하는 여인처럼, 혹은 자신의 기사에게 복종하는 중세의 숙녀와 같이, 루이스는 모든 것을 주님께 복종하고 그분에게서만 자신이 추구한 기쁨을 찾았다.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다른 위치에 설사 우리보다 ‘높다’하더라도,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칭찬함이 올바른 사람의 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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