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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현실을 통해 보는 주일성수 개념의 덕과 해악

ToBeIsToChange 2006. 3. 26. 01:15
성서와 현실을 통해 보는 주일성수 개념의 덕과 해악
주일을 지킴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힘써야 할뿐 신앙의 지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안오성(ohsung) [조회수 : 36]

 

 

1. 주일성수 과연 성경적인가?

1.1 롬14장 말씀

롬14: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이 말씀을 포함한 롬14:1~12 의 요지는

특정 음식을 안먹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과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감사하며 즐길줄 아는 자유하는 믿음을 가진 자에 대해 서로를 비난하지 말고 스스로 하나님앞에 거리낌이 없는 믿음의 분량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또한, 한 날이라도 굳이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서 "성수"하겠다는 사람과 모든 날을 주의 날로 알고 하루 하루 작은일에서 부터 주를 의뢰하고 주와 동행하는 삶을 지표로 하여 특정날에 대한 구속으로부터 자유하는 믿음을 가진 자가 서로를 비난하지 말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는 믿음의 분량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즉, 어느 특정한 날에 절대적이고 계율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이 주의 시간임을 인정하는 청지기적인 자세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값없이 주신 새생명의 하루 하루를 감사하며, 주 앞에서 각각 믿음의 분량대로 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본질적인 특정 음식, 특정 날에 대한 다툼으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이며 어떤 정형화된 형태를 고집하고 그외에는 모두 이단이라는 식으로 정죄하는 태도야말로 나와 함께하지 않으면 모두 나의 적이다라고 외치는 인간의 편협하고 옹졸한 집단이기주의적 발상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개별적 차이를 인정할 줄 모르고,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는 원인이며 비 본질적인 것을 신앙의 지표로 삼아 복음과 신앙의 본질을 흐리는 어리석고 죄악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어느쪽도 절대적이지 않으니, 단지 이로 인해 서로 비난하지 말것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믿음이 약한자들의 의심하는 것 (즉 특정 음식과 날에 메이는 것)을 용납하고 받으라고 한 것이다. (롬14:1~3)

1.2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요4:6~26)

요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이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나누신 대화의 결론적 부분으로서, 물을 좀 달라는 화두를 통해 다섯 번이나 결혼하며 세상적 안정과 세상것에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의 영적 황폐함을 일깨우시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만이 그 여인의 목마름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길임을 말씀하시는 중에 돌발적으로 발생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영적 필요를 깨닫고 돌연 예배문제를 꺼내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19~20)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위 인용된 요4:21~23)의 뜻은, 하나님을 예배함은 이스라엘이 주장하듯 장소적 개념에 속박된 것이 아님을 선언하신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왜 돌연 예배장소의 문제를 물었을까?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마음 깊은 곳에 갖고 있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 예화의 교훈이 있다. 즉 복음의 본질이 아닌 것을 강조할 때 그것은 오히려 믿음으로 나아오려는 이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장소적 제약(민족적 제약)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의 본질을 선언하셨던 것이다.

어디 장소적 제약으로부터만 자유한 것이랴

골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3 예수님의 깨우치심 (마12:1~13)

이 말씀은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안식일에 대해 논쟁한 것에 대해 가장 깊게 다룬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한 것(밀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비판하였는데 그들은 출16:23~30장 말씀의 만나 사건을 떠올리며 자신들의 비판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다윗이 성전안에서 안식을 범한 것을 하나님이 용납한 전례가 있음을 언급하시고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니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5~7)

이는 성전안에서는 안식일의 규범에 의해 인간의 정당한 행위들이 제한을 받지 않으며 성전보다 크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안에서는 이미 참 안식을 얻은자로서 제사적 행위를 구함보다 사랑의 실천과 이웃에 대한 온정을 구하는 참된 안식한 자의 삶의 모형으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1.4 주일성수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의 무익함과 본질적 예배의 의미

(행20:6-7)을 예로 들어, "주기적 안식일의 다음날, 즉 주일에 특별히 떡을 떼는 것과 여행을 하지 않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는 주장은 참으로 위험한 억측이요, 성경해석 접근방식의 심각한 오류이다. 전도사역의 일환으로 먼길을 여행하여 방문한 곳에 하루 이틀 더 유한 것이 주일성수와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인가?

예수님도 많은 기사와 이적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싸우시며 못다한 안식일 논쟁을 그 제자들이 다른 날 즉 "주일"을 새로운 안식일로 규율화 하였다면, 이는 당시 아주 심각한 이슈로서 바울의 서신서에서 분명히 다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와 관련하여 분명히 다룬 것은 어디에도 없으며 단지 위에서 설명한 롬14장의 말씀이 특정 날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골자이다.

자유케하는 진정한 복음은 특정 장소만이 아닌 특정 시간으로부터도 자유로이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예배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의 태도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아니, 본질적으로 필요한 전부임을 깨닫게된다. 참으로 지고 지상의 예배는 우리의 전 삶이 그 앞에 정직하게 드려지며 우리의 사고와 판단중에 그를 의뢰하는 삶을 사는 것이리라.(롬12:1~2)

일상 노동의 현장에서 진실되고 성실하게 사는 것, 아비와 어미로서의 도를 다하고 가족을 사랑과 인내로 감싸고 돌보는 것, 자기 마음을 지켜 세상것에 대한 탐욕적 집착과, 두려움에 굴복한 처세술, 비열함을 떨치고 하나님만 소망하는 것.(약1:27) 그를 의지하여 정의와 사랑의 편에서 영적 승리를 추구하며 개인적 삶을 통해 하나님을 실증적으로 알아가는 삶! 이러한 것이 진정한 예배, 곧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일 것이다.(호세아6:3,6 ; 미가6:6-8 ; 롬12:1~2)


2. 주일성수 개념의 덕

믿음의 선진들이 댓가를 치르며 지켜낸 이 전통의 덕은 무엇인가?

2.1 믿음의 성장을 위한 보호

주일성수의 계율화는 개인적으로 믿음의 반석위에 서지 못한 이들에게 최소한 지켜야할 구체적인 행위적 지표를 제시하고 교회에 나와야할 의무감을 줌으로써, 게으름과 바쁜 세상의 여러가지 급한 일들의 속박을 극복하고 교회예배에 나아와 하나님 말씀의 역사와 임재, 그리고 성도의 교제와 도전.. 이러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믿음이 성장하는데 도움을 준다. 즉, 현대의 바쁜 생활 패턴이 쉬이 앗아갈 수 있는 개인의 영적 관심을 주일성수 제도화를 통해 지키고 보호하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앙하는 자로 성장하게 도울 수 있는 면이 있다 할 수 있다.

교회가 중요한 규율로 제도화한 이 주일성수 개념으로 인해 군대내에서도 주 1회 종교 활동이 불가침의 성역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는 사실 군 생활의 특성을 고려할 때 아주 큰 긍정적 영향요소라 할 수 있다.

2.2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실천함.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됨을 면하라.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4:13, 10:24)

복음은 분명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것이고 신앙의 척도는 각 개인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일상의 어떠함으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안에서 지체된 이들이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걸음마 단계의 신앙이 보호되고 성장하며 서로에게 달리 주신 은사를 나누며 섬기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반한 데에 이르도록 자라기 때문이다.

2.3 몸에 새겨진 창조의 원리

하나님은 스스로 6일간의 창조작업후에 제 칠일에 안식하시고, 그 날을 축복하시며 우리 인간에게도 이것을 지키라고 하셨다. 낮과 밤을 주어 일할 때와 쉴 때를 제공하셨듯이,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할 날 즉, 쉼과 새로운 날을 위한 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함을 직시하였을 것이다. 이 몸에 새겨진 쉼의 원리는 여전히 유효하며, 우리 스스로 쉼을 원하고 필요로 한다. 그 쉼을 제도화하여 인간의 성취욕으로 인해 몸이 혹사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 주일성수의 또다른 긍정적 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에 불과한 안식일의 규례가 주일성수로 대체되어 일주일에 어느날이 되었든 하루는 구별해야 한다고 인식하게 된 과정에는 이러한 몸에 새겨진 창조 원리의 실재와 복음에 대한 인식의 부재가 가져온 결과라 생각된다.

2.4 자본주의의 횡포에서 노동자를 보호함

노예제도가 신분의 차별과 노동의 합법적 착취로 가져다 준 부와 풍요를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표준화되고 반복적인 노동과 대량생산 체제로 생산성을 높여 더 많은 이들이 값싸게 재화를 공유하며 풍요를 공유하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인간 노동의 가치는 점점 기계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값싼 행위로 평가절하되어 갔다. 자본이 없이 노동으로 생활하는 노동자는 노동가치의 상대적 하락을 보상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땀흘려야 하는 압박과 동시에, 업적에 따른 차등 보상과 풍부한 물질 문명에 대한 동경으로 자발적이고도 무분별한 노동에의 몰입을 가져오기도 한다. 또한 사용자는 일반적으로 공장회전율을 높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으며, 무한 경쟁에서 시장을 선점하려는 의도, 고용제 사장이 단기에 실적을 남기려는 의도 등으로 밤낮, 주말없이 노동자들을 압박하며 일하도록 하는 경우도 많다. 즉, 계급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한 노동자는 다시 자본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광란적 상황에서 다시금 인간의 조건을 생각하게 해주는 "안식일"의 의미로서 주일성수가 자리하고 있다.


3. 주일성수 개념의 해악

3.1 양심의 걸림돌, 양심을 더럽힘

현대의 노동자는 주일외에는 자신의 시간을 갖기 어려운 이들이 많이 있다. 안식의 의미는 그들에게 교회예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잠을 자는 것, 아이들과 충분히 놀아 주는 것, 사회생활에 쫓기며 돌보지 못한 집안일을 돌아보고 돕는 것, 가끔씩 친지를 찾아 뵙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잊지 않는 것, 이웃과 주위 동료의 경조사에 찾아가 축하와 위로를 나누는 것, 멀리서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는 것, 어려움에 처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 이러한 모든 일들이 온전한 신앙을 가진 일반 노동자들에게 짧게 주어진 주말에만 할 수 있는 일들로서 다가온다.

주일 날 사정이 있어 교회에 가지 못하여도 하나님앞에 거리낌없이 일상 중에 나아가기를 힘쓰고, 세상속에서도 그의 임재하심속에 살아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성수”라는 말속에는 이 특정날에 교회에 빠지면 거룩한 명령을 어기는 것이며 정죄의 대상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어 온전한 신앙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다. 이로인해 하나님 앞에  깨끗한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할 성도들에게 걸림돌과 정죄의식을 남김은 신앙의 뿌리를 좀먹게 하는 심각한 잘못이다.

난 약 한 달전 두달간의 해외출장후 한국에 일요일 새벽에 도착하였다. 집에돌아와서 아내와 아이들만 교회에 보내고 난 그시간에 수면을 취한 후 교회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오후내내 함께 놀아주며 시간을 보낸후 다음날 새벽 다시 금요일까지 떨어져 지내야하는 일자리로 향했다. 예배드려야 할 시간에 잠을 잔 것으로 내가 스스로 정죄감을 가져야 옳은 것일까? 난 그 시간에 단잠을 주시고 빠른 시간내에 시차에 적응하여 아이들과 소중한 시간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바울은 자신이 마땅히 취하고 자유로이 누릴 수 있는 것도 다른이들에게 걸림돌이 되거나 그 약한 믿음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자기 합리화 또는 믿음에 따라 행치 못하여 뒤로 물러가게 될 이들이 생길까 두려워 부러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힘들여 자비량 선교사가 되었고,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부러 먹지 않았다. 단 하나의 목표 즉, “형제 앞에 아무 걸릴 것을 두지” 않아 한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14:13)

3.2 복음의 본질을 가리움

사마리아 여인이 장소적 제약에 대해 그러했듯 매주일마다 교회에 가야 한다는 시간적 제약에 대한 두려움으로 교회에 나아오기를 주저하는 이들을 나는 많이 만났다. 특히 저소득층의 사람들일수록 그러하다. 이는  오늘날의 교회가 중산층의 전유물이 된 현상을 일부 설명해주는 대목이지 않은가? 나는 그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언하고 복음의 본질로 그들의 관심을 안내했다.

성경 어느 말씀에 한 개인이 거듭나기 위해 주일성수를 결단해야 한다고 나와 있는가? 그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인정하는 문제이며,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바라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겠는가 하는 것이 전부 이어야 하지 않는가? 이러한 것보다 교회생활의 규율(주일성수, 금연, 금주, 십일조 등등..)이 먼저 다가와 그들을 압박하게 하는 현실은 또 다른 법, 그것도 인간을 위한 법이 아닌 교회 조직을 위한 법으로서 율법의 완성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가리우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라 생각된다.

구원사역과 교회가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주일성수개념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본질이 될 순 없으며 이것을 계속 붙들고 있는한 자유하는 복음속에서 우리의 삶과 전인격으로서 예배하는 성장은 멈추고 특정 종교적 행위를 준수하는 것에 안주하여 살아가는 선데이 크리스천의 양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직장 동료들과 점심중에 나눈 이런 말이 생각난다. 군대 있을 때 심지어 자판기 커피 마실 때도 꼭 기도하는 상관이 있었는데 행실이 좋지 않아(연말에 부대에 할당된 면세 양주를 부당하게 사적으로 대부분 전용하는 등...) 많은 이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는 교회를 통해 본질의 근처에도 속하지 않는 행위를 철저치 배워 지키면서도 정작 복음의 본질과는 정 반대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3.3 가까이 하기엔 너무 바쁜 그리스도인

청년부 성경공부를 섬기던 시절, 교회 나온지 얼마되지 않는 한 조원이 일요일날 이사하게 되었다. 가난하여 포장이사도 할 수 없는 처지인데 그 형제는 건강한 몸도 아니었다. 신뢰하는 후배에게 내가 직접 가고 싶은 맘과 필요성을 전하고 예배와 성경공부에 나오기 보다 그 형제를 도와 주자고 제의하여 그 후배와 다른 한명이 그 이사를 도와주었다. 그날은 예수님이 인습과 전통으로 하나님의 법을 폐하는 이 시대속에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을 것이다.

평신도 사역이라는 말이 유행하듯, 신앙이 자라는 것과 교회봉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동일시하는 인식의 오류가 있다. 하나님은 이 죄많은 세상에서 믿는 우리를 당장 데려가지 않으시고 세상속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고지상의 목표로 성장해가야할 과제를 위해 남겨 두셨듯이, 진정한 신앙의 성장은 더 많은 교회활동으로 이어지는 것만이 유일할 모델일 수 없으며, 세상으로 나아가 나의 도움과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곳에서 삶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증거하고 실천하여 복음적인 가치관이 이 세상의 구석 구석에 자리잡게 하는 것이 더 어렵고 가치있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자기손으로 땀을 흘려 얻은 정직한 소득으로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는 주말이 유일한 노동으로부터 자유한 시간인데 이 때마저 교회활동에 전 시간을 몰입하여 이웃과 동료를 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가족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심각한 폐단이다. 교회봉사에 너무 바빠 자녀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 아버지를 둔 어떤 사람이 그 상처로 인해 아버지에 대한 원망뿐 아니라 그 부모가 그토록 열심히 섬긴 교회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는 이 땅의 치우치고 온전치 못한 교회의 모습을 항변하는 단편적 예이다.

종교적 행위를 하는데 집착하는 이들로서가 아닌 생활속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앞에 정직하게 살아가기를 힘쓰는 자들로서 우리는 이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

4. 제안 - 믿음의 분량대로

주일성수를 힘쓰는 것은 그것을 개인적으로 결심한 이들에게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주일만이 아니라 모든 날이 주앞에 드려지는 날이며 일요일 성도가 함께 모이는 것은 우리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힘써야 할 전통일뿐 정죄의 기준이나 신앙의 목표로 자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시다.

 

 

 

안오성

최종;주일성수 논의의 본질적 문제점과 도전 - 2/2

()
[2002-02-18]

(아래에서 이어진 겁니다.)

4. 더 나은 것을 사모하자.

더 나아가, 주일 성수 주의가 가져올 수 있는 또다른 오류는 주일을 대망하는 삶의 전형으로 우리의 신앙이 자리잡아가는 문제이다. 물론 이것은 은혜로운 신앙인의 자세임을 인정하지만, 자칫 이러한 태도가 가져올 수 있는 이원적인 삶의 태도에 대해 심히 경계한다.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주일을 지켜 거룩히 예배함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앞에 나아가기를 힘쓰며 일상 가운데 작은 일에서부터 그 앞에 정직하고 온전히 살아가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의 뜻을 이 땅의 구체적 삶의 현실가운데 실현해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이 세상은 우리가 회피해야 할 대상이며, 우리를 넘어지게 하기 위한 지뢰밭 투성이로 인식할 대상인가? 그리스도의 용사된 자에게는 이 세상이 나의 취할 기업이며, 그들은 우리의 밥이 아닌가?(민14:9)

주일성수를 강조함이 확대지향적 선교의 시기에는 용납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복음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어 책임있는 다수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은둔한 자가 되지 않고 세상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함을 강조할 때이지 않은가?

나의 믿음과 그가 주신 소망은 나의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 무슨 의미를 갖는지. 나 자신과 이웃과 일에 있어서 복음은 어떤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늘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며, 내가 도피하고픈 척박한 현실과 모순 속에서 의미있게 답이 되어지고, 우리로 하여금 생을 긍정하며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신앙으로 우리의 신앙은 자라가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 인용하였듯,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복음안에서 발견한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결국 이 소망없는 세상에 아무것도 줄 수 없고, 가난한 마음을 가진 덕에 천국의 부요함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개인적 구원에서 그칠 것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다음과 같은 비젼을 주셨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우며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하셨다. (이58:12) 이 말씀이 과연 영적으로만 해석할 말씀인가? 이 앞의 말씀들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누어 주는 것”등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이58:12)에서 말한 “네게서 날 자들”은 곧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진 오늘날의 우리 곧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어 하나님이 주신 세상으로 거침없이 나아가 두려움없이 눈물골짜기를 지나며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해야할 우리를 가르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84:6)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 인해 허무한데 굴복하고 탄식하는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그들이 보여줄 영광의 자유를 고대하고 있다고 하였다. (롬8:19~25)

오늘날 시대정신의 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니이체의 주장. 즉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며 탄식하는 인간들의 가슴을 움직인 멧시지는 무엇인가? “피안의 세계에 삶의 희망을 두고 오늘이 지나면 천상의 기쁨이 주어지리라 믿는 그것으로 오늘의 삶의 고통을 견디어야 하는, 그런 어쩔 수 없는 인내의 삶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고 결정하여 뛰어드는, 어떠한 위선도 없고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는, 가슴과 머리가 모두 하나가 되는 삶!....”, “니이체는 그의 말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들의 삶 위에 영원성의 도장을 찍자. 우리가 거듭 살기를 바랄 수 있는 삶을 살자. 이것이야말로 나의 신조인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내일을 뒤따르는 모든 어제들도 역시...’“ (방인상, 고독한 남자 니이체에 관한 수기중.)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고통을 감내하는 삶이 아닌, 풍성한 삶으로 부르셨다. 그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되 그 소망은 현실도피의 장소로서가 아니라 그들과 동일한 눈물골짜기를 지나며 탄식하는 상황에 우리가 처하더라도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있는 시온을 향한 커다란 소망가운데 이 땅에서 모든 거짓과 껍데기를 버리고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뿌리로서의 소망인 것이다.

즉, 일상 노동의 현장에서 진실되고 성실하게 사는 것, 아비와 어미로서의 도를 다하고 가족을 사랑과 인내로 감싸고 돌보는 것, 자기 마음을 지켜 세상 것에 대한 탐욕적 집착과, 두려움에 굴복한 처세술, 비열함을 떨치고 하나님만 소망하는 가운데 (약1:27) 힘써 사랑하고 그를 의지하여 정의와 사랑의 편에서 영적 승리를 추구하며 온전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실증적으로 알아가는 삶! 이러한 것이 진정한 예배, 곧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며 영원성의 삶이다.

니이체가 하나님을 부정하며 추구하고자 한 영원성의 삶! 이것을 우리는 복음안에서 찾을 수 있음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천국의 모형으로 교회의 예배를 강조하기 보다, 우리안에 이미 매일의 삶을 천국의 모형으로 살 수 있는 씨앗이 뿌려졌음을 믿고 그 것을 꽃피워 실증하는 것을 지표로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 수 있는지 본을 보여주셨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즉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요셉의 주인인 에굽사람 보디발이 그의 온전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듯이 우리의 온전함으로 그가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말씀의 원리에 따라 나를 쳐서 복종시켜 바른 인간으로 되어가는 것, 나의 좁은 자아를 깨치고 배우자를 사랑과 존경으로 품는 것, 관용하고 지혜로운 부모가 되는 것, 이 사회의 굽은 것을 곧게 하는 것, 소외되고 갇힌자를 돌아보는 것,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하며, 헛된 것에 메여 살아가는 자들에게 삶의 본질과 자유를 선포하는 것, 복음의 진보를 위한 구체적 실천과 언행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기득권과 권위주의와 넘치는 악을 버리고 진실한 한 인간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대하는 것이다.

그 때 우리 입가엔 우리 영이 알게한 즐거운 찬송이 잔잔히 머물게 될 것이다.

 

안오성

최종;주일성수 논의의 본질적 문제점과 도전-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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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18]

목회/신학란에 게재하고자 송고했지만 여러날 지나 게재되지 않아 리플로 대신합니다.

이 글을 정식 기사로 게재하지 않은 뉴조 편집진의 고민이 혹 저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산적한 교회개혁과 바른 교회상을 위해 고민해야 할 때에 이런 주제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인식을 줄 것에 대한 부담이죠. 저 개인적으로도 첫 기사로서 이 기사를 다루기가 부담스러웠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시작한 것 마침표를 찍어야 겠기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제도는 찾기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랑의 법외에는...

오직 만물의 근원이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의 은총을 중심으로 살아갈 때에만 참된 자유와 다양성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이 간단한 원리와 분명한 성서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큰 어려움이나 다툼없이 덕을 세워 갈 수 있을겁니다.

이 글이 많은 사람을 세우고 더 낳은 신앙으로 자라고자하는 도전으로서 기여하고 혹여 저의 무지함과 적절치 못한 표현으로 덕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이 도우시기를 기도하며,

뉴죠가 더 많은 이에게 홍보되어 개혁의 목소리가 힘을 얻게 도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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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성수 논의의 본질적 문제점과 도전

평신도님과 시골성도님 east님 그리고 질문님께

1. 글쓰기에 앞서

평신도님 이 문제가 그리 가볍게 털고 일어날 수 있는게 아니라는데 동의하고 제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나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또 여러분의 이 논의에 대한 염려가 내 한 몸 잘 믿자고가 아니라 복음의 진보에 누가 될가 염려함에 근거한 것이라 믿고 신중히 지적하신 내용들을 보았습니다.

우리중 누구도 자신의 주장이 객관적이라 말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즉 자신의 주관이 가능한한 객관성을 갖도록 노력할 뿐이며 많은 이들의 공감과 성경적 기초위에 두고자 하는 것이 믿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혼돈가운데 우뚝선 절대 지표요 변화를 거부하는 인간과 조직의 생리를 생각할 때 가장 큰 버팀목입니다.

한편으로 제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는 주관적인 의견으로 곁가지를 치려다 뿌리를 자르는 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저의 한계안에서 조심스럽게 의견 개진해야 하고 여러분의 정직한 비평이 필요합니다.

인본주의로 흐를 것에 대한 염려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십니다. 오직 만물의 근원이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의 은총을 중심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겐 인간을 위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상충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봅니다. 주일성수를 절대화하고 제도화함은 성장 일변도의 시대에 다수의 논리로 적합하였지만, 지금의 현실은 이것으로 인해 오히려 죄책감과 중압감에 괴로와하는 이들도 있고, 신앙의 싹이 자라기전 교회에 다니는 것을 그만 두는 이도 있습니다. 또 한편으론 예수님을 오랜세월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개인적인 만남의 시간의 풍요로움과 그와 동행하며 화목케하는 제사장으로서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 속에서 당당히 살아가는 삶을 지표로 신앙하기 보다는 일요일 교회활동 중심으로 신앙이 자리해 가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후에 더 논의하겠지만, 인본주의의 논의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어 실족치 않게 하시려는 주님의 복음의 본질이 무엇이며 우리 신앙의 지표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주를 위하는 자로서 그 앞에 바르게 살고자하는 사람임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논의는 무엇이 나에게 유익하겠는가라기보다 복음의 진보에 무엇이 유익하겠는가여야 한다고 봅니다. 어차피 여러분과 저는 이 논의를 떠나 일요일 교회나가서 예배드리고 신앙을 공유한 자들과 교유하며 주신 은사를 따라 몸된 교회공동체를 섬기는 가운데 교회의 덕을 세워갈 겁니다.

어떤이는 "의무"로서 가고 어떤이는 자유하나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따라 하되, 의무로써 하나 자유함으로 하나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이러한 각 개인에게 믿음의 진보가 있을 것이니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것에 대한 것은 논의의 여지가 아닙니다.

그것이 복음의 본질을 가린다거나 사정이 있어 주일을 성수 할 수 없는 자들에게 줄 수 있는 걸림돌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예수를 소망하는 신앙인들의 자세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번 글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평신도님과 시골교회성도님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좋은 질문에 대한 저의 견해는 이 글의 틀안에 들지 않았으나 다음 기회에 답하겠습니다.)

2. 믿음으로 행함

얼마전 십일조제도를 이제까지 고수하는 문제를 처형댁과 모임에서 말을 꺼내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 이것이 제도화된 유례를 설명하고 올바른 헌금의 원리로 잘아는 말씀(고후9:7) 즉,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않고 자원하여 즐겨할 수 있는 수준이면 된다는 원리를 나누었다.

물론 처형은 이 원리를 알고 있으나 남편이 개인 사업을 하여 다소 여유 있는 수입을 감안 십일조 이상을 교회헌금하고 있으며 별도로 소년소녀가장을 돕고 있다. 이 논의에 문제는 없었으나 믿음을 결단한지 4년정도 되는 처형 남편은 뜻 밖이라는 듯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아니, 그런 거였어?”그의 아내는 믿음으로 하였지만 그는 어느 정도는 일상화 되어 버린 교회의 형식/제도에 따른 면이 있었던 것이다.

성경은 우리 구원의 원리와 믿음의 성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롬1:17, 새번역)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한다는 것”을 Today's English Version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믿음으로 한 것은 언제나 그 행위의 목적으로서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으나, 제도화할 경우 그 행위의 끝에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단지 그 제도를 따르는 습관에 빠지거나, 경우에 따라서 중압감과 정죄의식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예는 쉬이 찾을 수 있다.  

제도를 통해 믿음을 배울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교회의 부흥에 기여한 핵심요소였음도 분명하다. 그러나 여전히 이는 제도로서 강요하여서는 결코 안되며 각 개인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도록 도와야 한다고 본다.

약하고 자기 합리화에 빠지기 쉬운 개개인의 위험을 생각한다는 이유로 이것을 제도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에는 쉽게 대답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성경이 이미 우리에게 깨우쳤듯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음”인데 주일예배를 게을리 할 경우 듣고 깨달을 기회를 상실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온전한 예배중에 강하게 역사하시는 주의 임재의 체험을 통해 많은 이들이 변화받고 신앙의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도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행하는 삶의 원리와 배치된다는 것이며, 모든 제도틀은 그 획일성으로 그것을 지킬 수 없는 구조속에 살아야 하는 자나 소수의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문제가 있는데, 이 면에 있어서 주일성수제도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모이기를 힘씀은 신앙의 성장 그리고 바른 교회운영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열매로서 받아들여져야 함  에도 불구하고 주일성수가 마치 큰 죄의 기준인 것처럼 신앙의 초보에 있는 이들을 호도하고 억압하여 “교인들을 죄책감과 신앙양심 불량자”로 만들어, 사회활동과 교회활동을 병행하는 가운데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 거치게 될 개인적 신앙의 한 결단형태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분량이 어떠하든 그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 절대적/획일적 규율로 군림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원리는 시종일관 동일하셨지만 그가 만나는 이들의 필요에 따라 구원의 본질을 여러 모양으로 달리 표현하고 도전하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어떤 행실이 반듯한 부자 젊은 이에게는 그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준 뒤 그를 따라야 얻을 수 있는 바늘구멍과 같은 것이지 결코 그가 갖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을 영속시켜주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구원이 아님을 알리셨고, (눅18:18-30)

나쁜 행실로 소외되어온 세리 삭개오에게는 그와 함께 저녁식사하며 개인적인 관심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그가 자진하여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보상하겠다고 한 결의를 보신 후 이미 그에게 구원이 임하였음을 선포하는 것을 통해, 구원이란 합당한 결단이 따른는 개인적/영적인 그와의 “만남”임을 알리셨다. (눅19:1-10)

그를 인정하나 유대인의 눈을 피해 밤늦게 그를 찾아온 이스라엘의 선생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나야 함을 강조하시며 그가 알아온 정죄의 법으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깨우치시고, 통회하고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주실 성령안에서 새롭게 거듭나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알리셨다. (요3:1-21)

열두해 혈루증으로 앓다가 감히 예수를 대면치 못하고 뒤에서 그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는 믿음으로 병나음을 얻은 여인에게는 친히 그녀가 누구인지 군중에서 가려내어 신유의 기적만 받고 그녀가 떠나가지 않게 하시고, 짧은 시간이나마 개인적/인격적인 교통을 하신후 그 믿음에 값없이 주는 구원을 선포하심으로 축복하셨다. (눅8:43-48)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지를 다투며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제자들에게는 “너희가 돌이켜 어리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도전하시며 그의 양을 먹일 자들이 교만해지고, 자기의를 실현하는 도구로서 사역할 경우 천국에서 상급은 커녕 구원조차 받지 못할 것임을 도전하셨다. (마18:1-7)

예수님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러하듯 여러사람의 필요에 따라 가장 적절한 수준의 것을 도전하시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믿음의 결단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다면, 오늘날 우리가 획일적으로 주일성수를 절대화하여 많은 이들의 믿음을 억압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

3. 국한화, 습관화의 위험

또한 우리에게 좋았던 경험, 익숙한 것, 정형화된 틀안에서 안정감을 갖고 습관화되어 결국 형식만 남고 알맹이를 잊어 버리게 되는 우리의 본성적 오류가 있다. 이러한 현상을 특정 시간과 장소에 하나님을 국한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반복한 그들 일상 삶의 부패와 하나님의 치심의 역사를 폴 투니어 박사는 그의 저서 인간 장소의 심리학 (A Place For You)에서 잘 설명하였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 대학의 교수로 종교와 심리학의 미묘한 관계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그 합일점을 찾으려고 노력하여 신학과 일반의학 심리학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막힌 문제를 풀어 준 것으로 크게 인정받고 있다. 이하는 그의 책에서 요약 인용한 것이다.
  
인간은 장소를 필요로 한다. 특정 장소에 가면 익숙한 좌석을 선호하듯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모든 사람이 찾고 있는 이 장소는 무엇인가? 나는 그 장소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진실로 안전함을 느낄 수 있고 실망을 하지 않도록 해주는 곳, 완전한 곳이라고 믿는다. 곧 우리가 일어버린 천국이다. 온 인류는 소위 말하는 “실락원”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장소를 찾는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한 장소도 찾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많은 곳에 산재한 가각 다른 수많은 신 대신에 유일신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 우주적인 신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큰 분이었다. 그들은 장소가 필요하다. 그를 찾을 수 있고 그를 경배할 수 있는 집합소만이라도 그들은 필요한 것이다. 모세가 거대한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시내산 꼭대기에 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자기들의 규모에 맞는 금송아지를 신으로 만들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들을 위한 신이란 점에서, 접근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국한적인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는 자신들의 하나님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비난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신의 초월적 인격이 구체적인 형상과 장소가 없으면 불안해 하는 인간의 본성에 의해 형상화 되고 표상되는 것을 경계하신다. 그렇지만 그 분은, 인간에게는 자기가 숭배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법궤를 제작하라신 것은 우상이 아니라 하나의 장소로서 한 분뿐인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들과의 약속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증거가 내포된 대상으로서 주신 것이다.

솔로몬은 성전을 준공할 때 다음 두가지를 지혜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을 한곳으로 국한시킴으로 인간은 그의 보편성을 망각하게 되리라는 두려움이요, 다른 하나는 한 특정한 장소에서 하나뿐인 모두의 하나님을 섬길 합당한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대하6:18) 그러나 그는 또 간구하기를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대하6:21)

그러나 이와 같이 하나님을 자기들만의 소유로 한다는 것은 신앙에 대한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성전을 자신들의 민족적 자랑거리로 만들려는 것은 마치 하나님을 온 지구의 통치자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좁은 소견에 불과할 뿐이다.

마틴 부버의 말을 빌리자면 솔로몬 시대의 성전은 “당신과 장소”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여호와와의 만남의 장소였다. 그러나 얼마 후 성전은 “그것과 장소”의 관계로 변했으며, 묘사되고 찬양받는 물건으로 변했다. 여호와 자신도 너무나 한정되고 국한된 자기 신전의 노예, 신학과 경건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래서 그는 갇힌 감옥을 부수고 나와 느부갓네살에게 성전을 파괴하라고 명하시고 다시 한 번 “당신”이 되었던 것이다.

그 뒤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예언자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보편성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를 지배하시고 이스라엘의 적인 느부갓네살도 그 분의 손 안에 들어 있는 하나의 도구인 것이다. (렘43:10) 하나님의 말씀은 외국 땅에서도, 갈대아나 이집트에서도 들을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사실은 예루살렘의 폐허 속에 남아 있던 자들보다도 유랑민들에게 계시되었다.

“나는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에서 내가 당신이라 부를 사람을 찾지 않는다”라고 부버는 말하고 있다.

열정에 사로잡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특정한 곳에서 그 분을 숭배하기 위해 하나님을 한 곳에 모셔 두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신앙은 지리적  혹은 종교적 배타주의로서 하나님을 그 장소와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해서 추는 국한과 일반화의 사이를 오랜 역사에 걸쳐 왔다갔다 하고 있다.

(폴투니어, 인간장소의 심리학, 보이스사 / Paul Tournier, A Place for You 중 발췌)

4. 더 나은 것을 사모하자.

(계속 이어집니다.)

 

질문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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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01]

저는 호주에 살고 있습니다.

호주 교회는 극심한 (안 그런교회도 있지만) 노쇠현상과 빈곤한 교회 출석으로 문을 닫아 가고 있습니다.

안오성님의 글을 읽으면서 호주교회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 맞는 글인데 그것의 중심이 인본주의적인 사고 였다면 그것은 또다른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호주의 어떤 신학교 교수님과 말씀을 나누면서 참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왜 주일 날 예배시간이 대부분 아침 11시인가? 과거 유럽 교회 교인들이  양을 치고 먹일 주고 올수 있는 시간이 11시라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를 율법적인 이해로 시작한것이 아니라 아주 실질적인 이유로 시작한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 전통으로 굳어진것이라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필요가 있습니다. 새벽시간이 특별한시간이 아니라 다들 일가기전 묵상의 시간과 기도의 시간을 가지는 훈련이 필요하기에 모이는 것에서 시작되는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따로 모여 기도하기가 힘드니깐요.

하지만 그런 실질적인 이유가 굳어져 율법시 돼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그 반대 극단으로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성경적이유를 무시할때 유럽교회나 호주교회같은 돌이킬수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성경은 모이기에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지만, 일주일의 하루를 투자해서 모이기에 힘쓸 가치가 있는 날입니다.

저는 어떤 이유때문에 교회나오지 못한것에 대해서 나무랄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훈련시키지 못한 나태함때문이라면 (자신만이 알고 있겠지만) 그 결과는 아무도 책임질수 없습니다.

극단으로 극단을 치유하려고 했을때 더 큰병이 생긴다는 걱정이 듭니다.

몇십년후 한국교회가 궁금해집니다.
현제 한국교회가 문제가 많다는 것 또한 인정합니다. 그래서 바른소리를 할때입니다 . 하지만 올바를 소리들은 많은데 한국교회의 장점이던 열정이 식어버린 텅텅빈 교회또한 문제입니다.

균형과 절제가 필요할때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수금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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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01]

주의 날입니까?
좋은 서비스(예배)를 준비하고
설교를 멋들어지게 하고
그 다음에 가장 중요한 수금을 하는 것...
혹시나 이것 뿐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아끼고 바라왔던 것을 버리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성도의 귀한 헌신을 보여준다는 면이 아름다웠습니다.
주일은 구별해서 하나님을 공적으로 모여서 예배한다는 사실이 아름답고 멋져보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담이구요

앞의 어떤분의 말씀처럼 공예배의 필요성이 먼저 거론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문제의 핵심에 있는 것은 공예배가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안식일이 주일이냐 하는 부분이 문제가 되어나타납니다.
성도가 주일을 안식일로 하여 지켜야 합니까?
아니면 다만 하나님 앞에서 공예배로 드리는 날로 되어야 합니까 라는 것이 커다란 화두입니다.
공예배가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이 나더라도 그날을 구지 주일로 정할 필요는 없고 성도의 합의에 의해 좋은 날로 정해야 한다면 그것도 옳은 말이라 하겠습니다.
만약에 주5일 근무제가 시행이 된다면 토요일 1부 예배 2부 예배 주일 3부예배 4부예배 식으로 나누어서 드리는 것도 공예배는 드릴수 있는 방법이 됩니다.
여기서 해결책을 제시하자는 것이 아닌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자님의 노력이 좋습니다만은 화두에 걸쳐진 이야기를 너무 넓게 다루신 것이 아닌가요?
집중도가 떨어진듯 싶어서요
오히려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려는 입장과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새롭게 생각하는 입장과의 차이를 분석하는 것이 빠르지 않은가요?
그것이 문제를 중간에서 보는 입장이지 않은지....
아니면 전반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셨다면 한종호님같이 여러번의 시리즈물로 글을 쓰시던지 말입니다.
전반의 문제가 될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열지 않고 기획물로 안식일적 주일계념이 옳은 부분과 옳지 않은 부분을 조목조목 따지는 것이 기사의 집중도를 높여주지 않을까합니다.
미련한 말을 좀 많이 했군요...^^

east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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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3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글을 쓴 집사입니다. 이번에는 주관적인 의견을 올립니다.
로마서 14장의 말씀 충분히 공감합니다.
저 자신 모든 날을 다같이 소중히 여기며 매일매일 24시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하나 죄악으로 가득찬 사회생활을 하느라 새벽기도 1시간 외에는 주님을 잊고 보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주시사 다른 날과 다르게 구별되게 보낼 수 있게 하여 주시는 은혜를 감사드리며 진실한 christian이 되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말씀은 진리의 성령님의 가르침을 바라며, 의문이 있을 때는 억지로 풀려고 하지않고 깊이 묵상하며 기도할 때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처한 상태에 따라 같은 말씀으로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은혜를 주시며 역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5년전쯤 미국에 1달간 출장을 갔다가 주일날 새벽(아마 6시경?)에 귀국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날 저는 교회에 가서 다른 날보다도 더 많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물론 아내와 자녀들과도 같이 예배를 드리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출장 중에는 주일날 교회를 가지 못한 때도 있었으나 다른 세상 사람들과 같이 "미국의 풍요로운 대자연을 감상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며 여행을 떠나지 않고 그날은 다른 날과 구별하여 혼자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말씀 묵상하며 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람들 생각으로는 처음 미국에 왔는데 광신자 같다고 비웃을 지도 모르나 안식일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니 미국 구경을 2년간 온가족에게 시켜주시는 것으로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이 구원의 문제와는 별개인지는 모르나 우리 구주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로서는 어떤 행동과 마음을 품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자세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실행할 때 하나님께서 온전히 책임을 져 주시는 체험을 많이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되게 지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성경 말씀(출애굽기,이사야,…)에서도 여러 번 명령하셨습니다. 다른날도 안식일과 같이 거룩히 보낼 수 있다면 더욱 큰 복을 받겠죠. 크리스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갈 때 온전하고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평신도

안오성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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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31]

목회자가 아니시라니 그냥 안기자님이라고 불러도 될런지요? 먼저 주일성수에 대한 문제는 그리 가볍게 털고 일어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의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였고 다시말해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의) 많은 활동 때문에 오히려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은 저또한 성경적으로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교회의 활동때문에 가정에서의 역할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의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다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예배와 명령을 준수하는것과 상충되는 일이 생겼을 경우에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하는점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죠. 요즘에는 아이들 운동회를 주일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빠들의 참여를 위해서 입니다. 그럴때 운동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가정에 소홀한, 또는 아이에게 어쩌면 상처를 줄 수 있는 아빠가 되고 맙니다. 이럴때 말씀안에서 아이에게 설명하고 주일을 지키는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가정을 위해서 하루쯤 주일을 포기하는게 좋을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전자입니다. 님은 어떠신지요?)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 아내가 만삭입니다. 지금 집에서 진통을 기다리며 초조해 하고 있습니다.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마침 주일 아침입니다. 아직 병원에 가기는 이르나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인데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겠지..하고 주일을 지키러 교회에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내의 곁을 지키겠습니까?(제 개인적인 생각은 후자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허락되어진 범위라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님은 어떠신지요?)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으며 불가피하게 주일을 지킬 수 없는, 아니 주일 성수를 고집했다가는 문제가 생기는 직업도 많습니다. 예를들면 경찰관, 군인, 소방관..등등 많습니다.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주일성수라는 이름으로 억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또다른 측면은 이러한 범위는 열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사하는 사람이 주일날 손님이 많기 때문에 가게문을 연다면 과연 말씀에 합당한 처분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님은 어떠신지요?

'하나님의 진노'운운 한것을 두고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주일성수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써 (당연히 저를 포함함) 인간의 편리함과 나름대로의 융통성을 마음속에서 조금씩 넓혀 나가는 인간 본성의 죄악이 있기에 그것을 철저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드린 것이었습니다. 제 자신에게 다짐하는 성격이 짙은 말을 님에게 한것처럼 되어 죄송합니다.

개인의 신앙을 잘 지켜 가라는... 님께서 걱정해주신 말씀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만 판단을 더디하라는 충고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님을 판단하지 않았고(그럴 자격도 없지만) 주일성수라는 것을 결코 덕스럽지 못한것으로(제목과는 달리) 쓰신 님의 글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성경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이지요...

다른 좋은 말씀들은...좋은 말씀인것 같은데 솔직히 어려워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무식함을 탓하며 이만 물러갑니다.


나그네

모든 날이 주의 날이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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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31]

십일조와 주일성수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는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항상 적용될때는 신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들어 모든 날이 주의 날이다 하는 말은 맞은데
과연 그 사람이 모든 날을 주의날로 살아가는지,

또 모든 날이 주의 날이라 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음을 핑게하는 것은 아닌지.

주일성수와 십일조의 가장 큰 해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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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31]


이 두가지 "죽은 율법"때문에 지금 이순간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교회문턱조차 안밟아보고 지옥으로 가고 있다.

사탄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을까!

안오성

이모든 논의가 무익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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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30]

전 목회자도 아니고 선생이라 불리우기도 부담스럽습니다. 이 허무하고 힘겨운 생의 도상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전한 인격과 가치와 사랑을 알게 된것을 무한한 다행으로 여기며, 하나님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을 단 하나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보잘것 없는 사람입니다. 머리에만 맴도는 공허한 이론과 가르침을 배격하는 까닭에 가능한한 open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저의 개인의 경험을 보였더니 주장한 본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것이 주목을 받아 “하나님의 진노”운운하는 비판을 부당하게 듣고 보니 참 씁슬합니다. (부당하다함은 그 비평에 근거를 찾을 수도 깨달을 수도 없어 하는 말입니다.)

로마서 14장의 말씀은 east 님과 평신도 님에게 무엇입니까? 제가 두분에게 바랄 것은 하나님앞에 결심한 바에 따라 개인의 신앙을 잘 지키길 원하는 것입니다. 다만 판단하기를 더디하고, 일반화하기를 더디하여 교회와 하나님 사업에 덕을 끼치는 길이 무엇인지 한번 더 고민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제가 자랑으로 삼을 것 단 한가지 그건 성경지식도 아니고, 제가 그동안 사회에서 성취한 것이나 직장에서 받은 이러저러한 상들이 아닙니다. 저를 아는 모든 회사 동료들이 인정하리 만큼 대단히 열심히 일해 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노동과 책임을 다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신앙하는 삶을 배우고자하는 과정으로서 그렇게 할뿐 모두 헛되고 배설물과 같이 여기온 사람입니다.(이것은 자랑이 아니요 한편으론 저의 큰 고민입니다. 아직도 지독한 허무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목회의 길로 당장 달려가려 계속 곁눈질 하는 나의 나약한 모습....) 저의 자랑이랄 것도 없는 자랑은 한가지, “아직도 난 하나님앞에 정직하게 살려는 것을 가장 최상의 목표로 갖고 있는 그 맘을 잃지 않았구나” 하는 이것이고 아직도 신학의 길을 택하지 않고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신학하기를 택한 그 때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신이 원하는 논거로 삼기에 너무 편리하게 쓰여진다" 고요? 전 오히려 가정을 소홀히 하고 활동으로만 치우쳤던 지난날의 오류에 대해 이 말씀의 원리를 알고도 적용하지 못하고 아내를 힘들게 하였던 지난날의 오류에 대해  후회할 뿐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아래의 평신도님께 도전합니까? 가정을 돌보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활동이 가져다 주는 책임감사이에 끼여보셨는지요? 제가  주장하는 원리와 다른 이런 말까지 해서 처참하지만 여러분의 약한 양심을 위해 말씀드립니다. 자기 한몸 무리하는 것에 선수인 저는 그 날도 오히려 집에 도착하자 마자 교회에 나서려 했죠. 그러나 오히려 무리하지 말고 자신과 아이들좀 생각하라는 아내의 만류를 진정 옳게 여겼 따른 겁니다.

전 오직 하나님의 말씀앞에 굴복하렵니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나마 있음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자 하는 열망과 혹 합리화나 한쪽으로 치우칠 것에 대한 염려로 부지런히 묵상하고 조금이라도 미심쩍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것이 내 삶에 아무 등불로서 살아나지 안음을 잘알기에 밝히 이해하려 노력한 덕입니다. 이는 제가 이미 온전히 하나님을 안다고 함이 아닙니다. 지식은 헛되며 나의 인격화되고 삶으로 실천되는 것 만이 진정 가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달리 알아가는 분들의 구체적이고도 정직한 의견들이 필요하고 겸손히 받고자 노력합니다. (단, 막연한 느낌이나 눈먼 당위론에 의한 비평은 사양합니다.)

제가 주장한 것은 적어도 저의 개인에게는 유익한 검증을 통한 것이었으며, 교회당중심이 가져온 이원론과 신실한 청년들의 사회부적응, 그리고 무서우리만큼 현명한 이 세상 지식인들의 따가운 시선도 모르고 마치 그 비본질적인 것이 대단한 것인양 그 주위에 맴돌며 외히려 “세상사람 날 몰라줘도~”라는 찬송을 외며 식자의 정직한 비평을 헛된 것으로 치부한 채 섞이지 않는 소금과 산아래 숨어있는 빛으로 살아가는 분들을 위해 그리고 이러한 현실인식을 못하는 목회자님들을이 안타까워 썼을 뿐입니다. 제가 바울을 뛰어 넘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러하겠습니까? 어찌하여 분명한 가르침이 있는데도....

이 모든 논의가 무익하지 않기를... 결국 우리는 어떠한 의견을 가졌든 이 사이트를 나가는 순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으로 제사함보다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정 경배하는 길임을 구약부터 줄기차게 말씀(미6:6~8)하여 오신 그분과 나만의 세계로...

평신도

'east'님의 의견에 절대 공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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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30]

안식일의 준수 의미는 그것이 성경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시대의 안식일과 같은 맥락은 아니니 안식교인으로 오해하시지는 말기 바랍니다.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조금씩 변화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가운데 충분히 자유함을 허락하셨고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왜?'라는 질문을 허용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안기자님께서(혹시 목회자인신지...) 이삿짐예와 해외출장예를 드시면서 그에대한 반박의 글에 대한 답글로 성경말씀을 인용하시는것을 보고 조금은 허탈해 졌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자신이 원하는 논거로 삼기에 너무 편리하게 쓰여진다는 느낌이 들기에 말입니다.

결국은 이러한 주장들이 하나의 추세로 다가오는듯 싶고 그것은 하나님 보다는 인간이 중심이 되고 나 자신이 우선시 되는 인본주의적인 생각들이 보다 깊숙히 파고드는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이것이 좀더 나을것 같고, 이것이 좀더 합리적일것 같아서 조금씩 취해보는 것들이 어쩌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 될까 두려운 마음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만과 불평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답하셨는가를 깊이 상고해 보았으면 합니다.

east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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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30]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관습이나 생각보다 우선하여 순종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대가 변해도 일점일획이라도 변치 않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라는 검색어로 성경을 검색하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켜야 한다는 내용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은 하신

 

안오성

몇몇 지적 사항에 대한 답변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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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30]

격려와 정직한 비평에 감사드리며, "지나가는 사람"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온전히 성숙되지 못한 글과 사유로 하나님께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앞으로 이곳에 글을 쓸 때 매사에 조심할까 합니다. 물론 본 기사도 그러한 맘으로 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합니다. (시골성도님, 지나가는 사람님) 모든 것에 형식을 배제할 수 없듯...
그러나 그 형식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감사와 회개함으로 그앞에 나아가고 기도와 말씀중에 임재를 확인하며 감성과 인격적 고백이 담긴 찬양가운데 하나님의 성호를 기리는 것이겠죠.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에게 있어서 이러한 것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할 수 있는 형식으로서 교회예배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예배의 “알맹이를”혼자 할 때 가장 많은 은혜를 받고 마음이 뜨거워짐을 어쩔 수 없습니다...
    
저 개인에게 있어서는 교회의 의미는 나의 가장 깊은 것을 공유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기쁨이고, 말씀을 받기로 준비된 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서 복음의 기초를 세워주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게하여 복음의 진보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는 부분이 큽니다.    

전 진정 한 날이라도 구별하여 열심히 지키고자 하는 이들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이 논의로 인해 그나마 믿음이 약한 분들이 뒤로 물러갈까 염려한 것이 사실이나, 모이기를 힘써야 함에 대한 말씀과 도전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질문”님의 질문을 보니 이 글의 논의를 통해 제가 전하고자 하였던 복음의 본질에 대한 인식, 비 본질적인 요소를 제도화/절대화 함으로 인해 본질이 가리워 지는 것에 대한 위험성, 참 예배로 성장하지 못하고 수많은 세대를 통해 검증되고 정착된 형식에 안주하려는 안정주의에 대한 도전, 이러한 문제점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일수록 이 땅의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외곡된 자아상에 대한 반성, 자유하나 하나님을 의뢰하며 매순간 우선순위를 분변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 등....

이러한 것들이 전해지기 보다는 어떤이에게는 저 개인이 신앙안에서 삶의 온전함을 위해 추구한 자유함이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만 크게 비춰지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분들의 신앙의 정진을 위한 개인적 성의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바랄 것 외에는 소망 없는 인간이므로....

잘못된 목회를 하는 이들, 교회재정의 불투명함, 사회제도에 추월당한 교회조직의 실추된 도덕성 과 자정능력 상실 등으로 인한 교회와 목회자님들에 대한 회의는 다른데서 논의를 하셨으면 합니다.

전 하나님을 섬김에 대한 또다른 시각을 공유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그것을 온전한 신앙을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감히 자신합니다. 또한 그것을 인정치 않고 목회자가 낡은 전통에 묶여 있을 때, 의도하지 않게 복음의 본질을 가리우며 실족케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모이기를 힘쓰자고 하여도 충분할 것을 제도화하여 정죄감을 주고 그 양심이 더러워져 뒤로 물러 가게 하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중심이 되어야 할 설교에서 “교회중심, 성전확장, 주일성수”등 을 외치는 것은 대다수의 경우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예수가 중심이기에 가정과 직장에서 개인의 삶도 바르고 열심히 살아야 하고, 이웃도 열심히 사랑해야 하며, 교회에도 열심히 가는 겁니다. 어느 하나에 치우칠 수 가 없죠.

"무슨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3: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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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담은 질문님의 질문에 대한 개인적 답변입니다. 충실하게 긴말로 답하지 않는 점 양해 하십시요.
질문님)만약 주일날 다른사람 이사짐 날라주는게 우선 순위라면 ..왜 목사만 설교하고 주일 지켜야 돼냐요? 내말은 집사님한테 옳은 일이면 목사한테도 올은 일이니깐 목사도 이사짐 날라야죠.
..신앙있는 당신은 괜찮다 치고 성도의 교재와 복음을 들어야할 새신자는 누가 복음제시하고 사랑을 베풀수 있나요 신앙있는 당신같은 사람이 이사짐날르느라 다 나가 있으면요?

==> 그래서 본문에서와 같이 후배에게 부탁하고 전 그 후배가 빠진 채로 성경공부를 진행했던 적도 있습니다. 얼마전 제가 직접한 것은 직분이 없었기에 해당사항 없고, 직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 “교회가야 하니  무조건 안된다 하고는 절대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을 겁니다. 전 이러한 행위를 통해 믿지 않는 이들과 진정으로 교류하고 바른 인간, 이웃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혹 그리스도를 전할 기회로 이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질문님) 그리고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교회봉사 하는 사람들이 다 가족 하고 노는 게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가족없어 교회공동체에서 가족을 찾는 사람은요?

==> 억울하면 결혼하세요. ^^

농담입니다. 정직한 질문입니다.
신24:5에 보시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년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저는 이러한 말씀을 주셔서 활동과 자기 영역 확장에 급급하여 가정을 소홀히 하지 말것을 일깨우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이들이 언제까지나 부모의 친밀한 관심과 놀아주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전 주말부부인 터라 지금의 저 개인적 우선순위는 그런 상황에서는 늘 그러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몇 번이나 되겠습니까?  

질문님) 그리고 혹시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번주에 기다린 사람이 있는데 당신이 피곤해서 않나오는 사람이라면 공동체가 당신을 얼마나 신뢰할수 있을까요?
==> 지나친 걱정이십니다. 이건 진담입니다.
    헤헤...

질문

질문요 안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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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29]

만약 주일날 다른사람 이사짐 날라주는게 우선 순위라면 ..왜 목사만 설교하고 주일 지켜야 돼냐요? 내말은 집사님한테 옳은 일이면 목사한테도 올은 일이니깐 목사도 이사짐 날라야죠.

..신앙있는 당신은 괜찮다 치고 성도의 교재와 복음을 들어야할 새신자는 누가 복음제시하고 사랑을 베풀수 있나요 신앙있는 당신같은 사람이 이사짐날르느라 다 나가 있으면요?

그리고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교회봉사 하는 사람들이 다 가족 하고 노는 게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가족없어 교회공동체에서 가족을 찾는 사람은요? 그리고 혹시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번주에 기다린 사람이 있는데 당신이 피곤해서 않나오는 사람이라면 공동체가 당신을 얼마나 신뢰할수 있을까요?

흠 ...궁금한데

시골교회 성도

예배의 형식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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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29]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실존적인(추상적인) 삶의 차원과만 동일시하려는 분들은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약의 마지막 책임에도 불구하고 장엄한 예배의 표상으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형식이 늘 신앙의 장애물인 것은 아닙니다. 본질이 없는 메마른 형식이 문제일 뿐이지요. 바른 본질을 담은 형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나가는 사람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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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29]

지나가는 사람은 삶으로서의 예배를 이루기 위해 진실하게 노력하는 신앙인입니다. 그것을 하지 말자는게 아니구요... 요는, 주일성수라는 틀만 불편하게 여기지 말고,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 주일성수는 비단 한국교회의 산물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 주일을 아름답게 지켜왔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가 예배에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바른 예배를 회복하지 못한채 주일성수만을 고집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일탈현상이 헌금이니, 세과시니 등등으로 표현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모임으로서 교회를 말하고 있고, 그 교회의 예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단순하게 개인적인 삶의 차원으로 환원시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 일고 있는 가정교회모델로서의 예배와 사귐으로서의 주일성수 좋지 않습니까? 가정교회로서 초대교회는 헌금도 많이 했고, 수적 성장도 대단하지 않았나요?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법을 배우러 간다는 말은 도데체 어떤 신념에 - 성경은 아닌 것 같고 - 근거된 것인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예배는 곧 하나님과의 사귐이 아닌가요!
예배는 성도들의 하나님 찬양은 아닌가요!
예배는 구원을 기념하는 축제가 아니던가요!
예배는 우리의 구원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요!
예배는 언약공동체의 자기정체성의 확인이 아니던가요!

그 확신으로 세상으로 나가면 좋은데...
그래서 꼭 모여야 하는데...지나가는 사람은 실존에 있어서도 연약한 나그네이기에, 정해진 날에 하나님과 교제없이는...먼지가 되어버릴 것 같아요...

 

 

길벗

'진정한 예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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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29]

굳이 로마서의 그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주일-일요일이다 안식일이다 구분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그런 구분은 '편의상' 하는 것입니다.
주일-일요일이 '예배의 날'로 한국교회에 인식된 것은 얼마나 한국기독교가 '형식적인 종교'에 머물러 있는지를 반증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편의상 일요일(이날을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도 성경적은 아님)을 '예배의 날'로 정한 것은 그날에 대다수의 교우들이 모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일요일-주일은 '예배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기독교에 대한 무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일요일에 모이는 것이 가장 편리한 일이라도 '예배드리러' 모인다고 하기 보다는 '예배드리는 법을 배우러' 모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jerry

안오성님의 의견을 적극 지지합니다.

()
[2002-01-29]

안오성님의 의견과 믿음에 지지를 보냅니다. 아울러 이러한 묵상의 터를 마련해주신 뉴스앤조이 여러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안오성

누락된 결론 부분과 제가 생각하는 논의의 핵심

()
[2002-01-28]

원문의 결론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4. 제안 - 믿음의 분량대로

주일성수를 힘쓰는 것은 그것을 개인적으로 결심한 이들에게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주일만이 아니라 모든 날이 주앞에 드려지는 날이며 일요일 성도가 함께 모이는 것은 우리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힘써야 할 전통일뿐 정죄의 기준이나 신앙의 목표로 자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시다.

주일날 자신의 쉼과 가족과 이웃을 위해 시간을 내어야 할 필요가 있거든 각기 하나님앞에서 개인의 믿음으로 우선순위를 정하여 행할 뿐, 성경적 근거도 없는 "주일성수"주의에 따라 스스로를 정죄하거나 타인에게 이것을 신앙의 지표로 강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는 이는 복이 있습니다. 의심을 하면서 먹는 이는 이미 정죄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롬14:22,23, 새번역)

5. 제안 - 목회자님들께

이 땅에 교회가 많고 교회출석인들이 많은 것은 이제 오히려 부끄러움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겨자씨와 같은 적은 누룩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것이 복음의 능력인데, 한국의 현실은 그 많은 교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극심한 부정부패와 물질주의가 만연해졌고, 많은 믿는자들이 이런 시류에 편승하며 때론 그 중심에 있습니다.

존경할 수 있는 지도계층을 찾을 수 없어 탄식하는 민중들은 이제 핍박받는 소수가 아닌 책임있는 다수가 된 교회와 믿는자가 그들 곁으로 돌아와 온전하고 도덕적인 삶의 지표를 보여주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대조적으로 빛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우리는 서로 다투고, 바른소리하는 장로를 쫓아내고, 바른말하는 목회자를 파면하기에 급급하여, 교회활동에는 열심히 있으나 세상속에서 올바른 리더쉽을 발휘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일에는 무관심한 것이 우리의 자화상 아닙니까?  

“주일성수”는 본질이 아니며 다만 모이기를 힘쓸 뿐이라고 선언합시다. 그리고 주일이 아닌 주중에 개개인의 삶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성도들을 도전합시다. 하여 주일을 개인의 사정으로 성수하지 못하여도 하나님 앞에 깨끗한 양심을 갖고 거리낌이 없이 남은 날들을 담대히 주앞에서 살아가며 다양한 상황과 작은 일에서부터 스스로 우선순위를 분변할수 있는 살아있는 신앙을 훈련하도록 인도합시다.

이로인해 일요일 교회에 나오는 성도의 수가 줄거나 그들이 자기 합리화에 빠져 모이기를 게을리 할 것에 대한 걱정이 있다해도, 허다한 무리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준비된 기드온의 삼백 용사로만 미디안을 싸워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들에게 정형화된 규율에 대한 눈먼 순종으로 안주하지 않고, 개인의 믿음에 따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며 일상의 삶에서 자유하나 자신을 쳐서 복종케하는 진정 살아있는 신앙을 가르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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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성수를 귀히 여기는 여러분을 무너뜨리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염려하였기에 주일성수의 덕을 여러모로 묵상하며 정리하였습니다.

주일하루를 힘써 지키는 분들을 하나님은 칭찬하시나 그것에 안주하는 이도 칭찬치 않을 것이요, 그것을 절대화 하여 다른 이를 판단하는 이도 칭찬치 않으실 겁니다. 그것이 몇일전 "안식일적 주일개념은 또다른 우상화를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하신 한 목사님의 진정한 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그러지 않아도 그 편협함으로(적어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다가오는 인상은 그렇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에게 오히려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적이라고 신앙하는 그것이 그들에겐 편협함과 우물안 개구리 같게만 비춰집니다.

예수님이 절대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그 많은 용서와 치유와 자기 희생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부르짖은 것, 그것은 자신만이 곧 생명의 떡이며 자신은 유대인이 원하는 정치적 해방이나 민중이 당장 원하는 치유와 썩어져 없어질 떡을 주는 것이 아닌, 참 생명의 떡 곧 자신의 몸을 속죄양으로 바쳐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것을 절대화 했을 뿐입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비 본질적인 전통이 하나둘 절대화되고 신앙의 지표화되어 복음의 본질을 가릴 것에 대한 우려요 저는 실제 그런이들의 소문뿐 아니라 가까이서 그리고 전도중에 몇몇 만났습니다. 또한 주일예배 착실히 드리는 것으로 신앙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착각하고 그 가정에서, 그리고 그가 속한 사회에서 형편없이 사는 이들은 우리 주위에 흔하디 흔합니다. 또한 교회중심, 주일성수를 절대화한 나머지 신앙의 성장이라는 것이 더 많은 교회활동으로만 이어져,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여전히 비진리적인 요소와 영향력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고 사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찾아보기 힘들거나 혹 찾아도 교회가 심어준 정죄감과 걸림돌에 좀먹힐 데로 좀먹혀 하나님앞에 힘써 의를 행하며, 그의 은혜안에서 깨끗한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힘쓰는 이들을 찾아 보기 힘듭니다.

전통이 본질을 가리는 것에 대한 우려는 유대의 그 허다한 전통들 속에 하나님을 신앙함이 없음을 보신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 잘 나타납니다.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니의 말씀을 폐하고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하느니라"(막7:13)

이렇게 하나님을 신앙하기 평화로운 시기에
그리고 거룩하고 온전한 신앙으로 주를 신앙하는 삶의 매력을 보이기 좋은 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는 세상등지고 교회로 교회로만 모여들여 저하나 구원얻으면 다인줄알고 살아가진 않습니까?

저는 제 동료가 일요일 이사가 있으면 앞으로도 교회예배빠지고 두팔겉고 가서 힘써 도울 겁니다. 제가 계속 주말에만 아이들을 볼 수 있고 아이들이 아빠를 필요로 하는한 더 많은 교회 활동을 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스스로를 자세시킬 겁니다.
조직의 필요에 의해 일요일 출근하라는 지시에 중간간부로서 그 필요성을 다시한번 묻고 저항하겠지만, 필요하다 판단되면 부하직원에게 짐을 떠 넘기고 난 교회가기보다 제가 먼저 나와서 팀에 멋지게 공헌하겠습니다.

좋은 전통이라도 시대 상황에 따라 재해석되고 신앙의 본질에 비추어 재정립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왜 한국교회 성장이 멈추었습니까?
전 우리의 삶이 우리신앙의 덕을 그들에게 증거해주지 못했고 오히려 교인수 부흥을 향해 달려오며 놓친 참 예배와 올바른 신앙인의 삶의 모형에 대한 가치정립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