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소재
성기문 - 혹시 당신이 섬기는 것은 무당?
ToBeIsToChange
2006. 3. 26. 01:04
혹시 당신이 섬기는 것은 무당? |
교회여, 하나님의 종을 두려워
말라 |
|
성기문(scholar)
[조회수 :
34] |
|
|
|
한국교회에 끈질기게 떠도는 말 중에 평신도는 "하나님의 종"을 잘 섬겨야 하고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마치 이 말은 평신도가 하는 일 따로 있고 목회자가 하는 일이 따로 있는 것처럼, 혹은 목회자가
하는 일은 더 거룩하고 하나님께 더 가깝고 평신도가 하는 일은 덜 거룩하고 하나님과는 더 먼 관계인 것처럼 여긴다는 의미 아닐까?
원래 평신도(laity)라는 말은 "무식한," "별로 중요치 않은," "속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런 속뜻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성직자란 "거룩하고" "고상한" "구별"된 뭐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말에 전적으로 수긍할 평신도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뭐, 자신들이 그렇게 규정하고 싶다는데야, 누가 말릴 수 있으리요.
그런데 말이다. 요즘은 그게 도가
지나친 상태로 간다는데 있다. 요즘은 "하나님의 종님"인 목회자들을 너무나 떠받들다보니, 경외하거나 두려워하는 수준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이쯤
이야기하면, 꼭 나오시는 분들이 계시다. 요즘 세상에 목회자들을 경외하거나 두려워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되랴? 그런 교회들도 있냐?는 식의 반문을
해오시는 분들이 계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답답한 마음이 든다. 너무 좋은 교회만 출석하지 마시고 눈을 들어 문제 많은 이웃교회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고맙겠다.
목회자를 떠받들고 두려워하는 것이 꼭 무당(巫堂) 대하듯이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무당을 찾아가 보신
분들이 있으면 내 이야기가 더 신뢰감이 느껴질 것이다. 무당들은 일종의 영매(靈媒, medium)다. 즉 신들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 이들은 복채를 받아 생활하고 내방자(來訪者)의 생사화복을 점쳐주고 복을 받아들이고 화를 피할 수 있는 방책들을 제시해준다.
또 중요한 것은 무당들 앞에만 가면 오금이 저려진다는 것이다. 이들은 신통해서 과거의 일을 족집게처럼 맞추며 미래의 일도 잘 알고
있다(물론 과거의 일은 백발백중이나 미래의 일에 대한 정확한 예언은 50% 이하가 보통이다). 이들은 주로 내방자에게 반말짓거리를 주로 하며
호통도 치고 공포감을 유도하길 좋아한다.
이제 한국교회의 기복신앙과 신비주의는 소위 새벽제단이나 가정제단, 혹은 기도원, 부흥회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필자가 민망스럽다.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소위 정통적 교회의 정통적 목회자의 설교와 행동에서
묻어져 나온다. 신도들은 필자와 상담하는 중에 이런 말을 자주 한다. "...하면 복 받는다" "...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는 말에 두렵고
떨리고 심지어는 괴롭기까지 한다. 남의 이목이나 저주받지 않을까봐 ...를 한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런 저주의 망발은
강단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화를 통하여 혹은 심방을 통하여서도 진행된다고 한다. 목회자가 집도하는 예배가 더 성스럽고 무엇을 하든지
목회자에게 자문을 구해야하고 사업을 시작하면 반드시 목회자를 모셔야 하고 축복기도를 받아야 한다. 그냥 주안에서의 심방이나 위로나 격려나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권면이나 기도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국교회 목회자는 무당이 되어 버린다. 물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무당과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들간의 공통점은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저주와 축복을 독점하는
자들로 입을 열면 축복이요 입을 열면 저주의 말이 나올 뿐이다. 이제 신도들은 마음대로 생각도 마음대로 이사도 마음대로 말도 할 수 없다.
어렵게 받은 은혜와 어렵게 받은 축복이 날아가거나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을 잘 섬기는 일만이 복받는 일이고 저주를 회피하는
일이다. 물질로 잘 섬길 뿐만 아니라, 모든 예식과 행사에 열심히 참석을 해야 한다.
선지자라는 자들이 나의 백성을 속이고 있다.
입에 먹을 것을 물려주면 '평화'를 외치고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면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한다(미 3:5).
자신에게 물어보라.
무당에게 고상한 윤리를 요구한 적이 있는가? 무당에게 복채로 낸 돈이 정당하고 바르게 쓰여지도록 요청할 수 있는가? 무당에게 사회적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가? 무당에게 거짓을 말하지 말고 정의를 구하고 진리를 말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목회자들은 기독교는 윤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발언권이 곧 진리요 교인수가 곧 정의다. 그들의 결정과 이념이 곧 윤리며 삶의 지표다. 헌금은 하나님께 낸 것이기
때문에 따지지도 말고 묻지도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만이 알아서 하신다고 말한다. 성도들에게 부여된 것은 오직 맡은 바 충성이지,
따지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럼 하나님은 진정 사람을 들어서 쓰지 않으신단 말인가! 목회자에게 고상한 윤리와 상식과 재정사용의
공정성과 투명성, 민주성을,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정의를 구하고 진리를 말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고 그들은 온갖 변명과 자기 합리화와 거룩한
복음전파의 이름으로 정당한 요구와 요청을 물리친다.
수적성장지향주의자들은 거대한 교회건물과 수많은 교인들과 흘러 넘치는 헌금이
자신들의 방패막이로 삼는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던들 이러한 거대한 업적을 상상하기라고 했을소냐?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으셨더라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소냐?
이 도성의 지도자들은 뇌물을 받고서야 다스리며, 제사장들은 삯을 받고서야 율법을 가르치며, 예언자들은
돈을 받고서야 계시를 밝힌다. 그러면서도 이런 자들은 하나같이 주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고 큰소리를 친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는다'고 말한다(미 3:11). |
안오성 |
장동익님께  |
() [2002-06-24]
|
저의 글에 대해 쓰신 것 같아 답합니다. 장동익님과 같이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노라
자처하며 오히려 여러 어려움을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감내하는 분들이 또한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
표현이 적절치
못하였음을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저의 지적은 의도적으로 그런 일을 행하는 분들을 향함이 아닙니다. 말씀드리면 다 알만한
지명도를 갖고 극동방송에 휼륭한 설교자로 이름을 떨치는 분들의 설교에서도 은연중 젖어 있는 그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을 저
개인의 삶에서는 "이해"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많은 "은혜로운" 맘을 선호하는 분들이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그
차원을 넘어 한 사람이라도 실족케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엄중하게 경고하신 주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의 말과 관행에
부지불식간에 스며든 그 비 본질적이고 주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들에 대해, 그리고 그로인해 지각있는 자들에게 걸림돌이 될 것들에 대해 다른
각도, 즉 냉엄하게 자성이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그리 주장하였던 겁니다.
허나, 여전히 님과 같이 외려 주로 인해 고난과
사람들의 기막힌 오해와 억울함을 감내하시는 분들께 오히려 덕이 되지 못한 점을 생각할 때 송구함을 감출길 없습니다.
그것이 글의
한계이고 더욱이 아직도 미련하여 글에도 어눌한 저의 한계입니다.
또한 어느때든지, 저는 부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 알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는 고로
전체에 대해 싸잡아 비판할 권한이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으니...
일부를 보고 안타까운
맘에 전체인양 말함에는 언제나 오류가 서려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의 위로와 평안이 있으시길
바라며.. | |
장동익 |
그래요! 다 그런것이
아닌데  |
() [2002-06-22]
|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무엇 안다고 그런말하시는 모든 목회자가 그런것처럼 말씀하는데 시골에서
열심히 정말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듯 섬기는 목회자를 생각해서라도 그런말하면 안됨니다. 항상 부정적인 말만했나요 돌을
들어 죄없는자가 치라고 했는데 님은 양심에 꺼리끼는 행동을 안했나요 목회자가 그렇게 무당처럼 복채을 받는것 보았어요?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써 너무
불쾌합니다. | |
독자 |
안오성님의 절규가
쟁쟁합니다.  |
() [2002-06-22]
|
그러한 모습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니 어쩌겠습니까?
진리는 있되 그 진리를 지켜 행하는 자는
없고, 사랑은 있되 진정한 사랑은 없는 인간세상!
예수는 믿되 예수의 정신은 없는 종교인들---
육신에 져 육신의
요구되로 살다 육신과 함께 썩어질 우리여!
누가 주를 알아 주의 사랑에 있는가?
말도많고, 복음도 많건만 세상은 왜?
이리도 어두운가?
선생도 많고 가르치는 자도 많고 외치는 자도 많이 있건만, 듣고 행하는 자는 없도다!
지식은 높이
있되 생명으로 있지 못해 교만과 아집으로 네 이웃을 아프게만 하는도다!
안다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모르면 죄를 물을 수
없거니와 너희가 진리를 안다하니 그 죄가 너희에게 있느니라!
옳고 그름은 분별하되 행치를 못하니 그게 죄이니라! 알고도 행치 못하니
이 일을 어찌할 꼬?
자기의 연약함으로 행치 못함을 날마다 괴로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나 행치 않고도 부끄러움을
애써 외면하려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으리라!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 이 모든것을 감찰하시노라!
오호라! 누가 스스로계신
그분의 눈을 피할 쏘냐? 아무도 그분의 불꽃같은 눈을 피할 수 없도다!
그러니 죄의 길에 있는 자마다 속히 돌이켜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영원히--- | |
안오성 |
날라리님의 글을 읽고
...  |
() [2002-06-21]
|
날라리님, 님의 아픈 경험을 나누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님의 고통어린 경험이
안타깝지만, 그러한 고통과 모순이 되풀이 되는 악순환을 타개하기 위해 님과 같은 분들의 비판이 오히려 교회를 사랑하는 회초리로
작용하기를 바라는 맘입니다.
저도 아버님 돌아가시기전 이분접적인 사고와 몸담은 선교단체에서 “죽은자로 죽은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와서 나를 좇으라”라는 말씀으로 도전함에 따라 말기암으로 고통하시는 아버님이 임종하시기까지 잘 찾아뵙지도 못하고 겨우 하루 이틀 가서는 고아로
자라서 해방과 6-25의 고통의 현실들을 온몸으로 이겨내며 우리 4형제를 키워내신 아버님께 겨우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갑니다. 아버지 잘못한 것
많으시잖아요”라는 무지 몽매한 복음이나 전했지만 아버님께대한 위로와 존경과 예우를 다하지 못하였음을 사뭇치게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외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히려 온전한 사람이 되고 더 수용할 줄 아는 인간이 되고 더 낮은 자리에 임하여 진정
섬김으로 이 세상사람들과 만나야 할 터인데
실상은 님이 지적하신 것과 같은
세상것이면 무조건 배척하고 교회를
위한 것이면 가정을 내팽겨치고, 사회인으로서 책무를 등한히해도 무조건 칭송의 대상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열등하고 마귀의 자식인양
비하하는 무지하고 왜곡된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교회 목사와 아무 빛과 소금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더러운 소문의 근거지로 일반 지성인의 우려의 대상이 되어버린 거품같은 교회성장이죠
다 그렇지는 않다고 하지만
그런 독버섯을 찾기 어렵지 않고 그러한 시류에 암묵적으로 편승하며 한두가지 개혁적인 것을 지향하노라 자처하나 실상은 여전히 이분법적인
사고와 교권적 권위주의, 외형적 성장 지상주의, 기복신앙에 머물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얄팍한 하나님과 인간이해로 전부다
아는양 하며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각인에게 개별적으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차단하며 자신들이 경험하고 인정하는 것만을 절대화
하여 자유를 위한 부르심을 규격화되고 제단된 형식주의로 전락시켜 비 본질적인 것으로 핏대세우고 타인의 믿음을 함부로
판단하여 신앙양심에 정죄감을 주어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인격적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는지 통탄할 노릇입니다...
제사문제도 이전엔
그것이 우상이었을지 모르나 이젠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것이 우상이 아니라 하나의 사별의 정을 표하고 사랑하는 이를 기리는 형식이 되어버렸는데
그것으로 쓸데없는 분란과 억압을 하는 것도 잘못이라 봅니다. 제사문제에 대해서는 이강무님이 쓰신 “효의 극대화”라는 글에 리플로 달은 것으로
부족하나마 저의 의견을 대신합니다.
저도 고신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어릴쩍 신문배달할 때 한 고신교회 집사님은 일요일에만
집에 있어 만날 수 있었는데
주일이라 돈을 줄 수 없다하며 몇달씩 밀렸죠... 결국 그 집사님과 같이 연체한 사람들로
인해 신문팔이 소년들은 신문 없는 일요일도 보급소로 집결하여 수금하러 다녀야 하는 모순... 그러면서도 자신의 교회에 사람을
묶어두기 위해 버스타고 교회오는 사람들은 잘도 용인하는 촌극을 보이더군요.
우리의 신앙고민은 어찌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속에서 더 진실되고 바르게 섬김의 자리에 서서 자신의 삶을 통해 주의 영광을 드러낼꼬라는 것 보다는
교회에서 호도한 몇몇
형식들에만 충실히 따라서 교회를 부흥케하고, 목회자와 당회의 인정을 받아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이르러 감투하나 하여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세상의 칭송을 구하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교회에 편히 앉아 “오라 오라 ..”노래부르면서도 소외되고 약한 이들을 향한 손길하나
뻗지 못하고 지체 부자유자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돕는 사람을 부탁하면 이교회 저교회 다 외면하는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런 일에
자원하여 섬길 성도하나 키워내지 못하면서 꼬박꼬박 예배드리면 뭐하고 향기로운 제물로 주보 뒤에 수두룩한 십일조 헌납자들 나열하면 뭣하고 선교사
몇 명이네, 성도 수 몇 백이네 하면 뭣합니까?
차라리 어느 분이 공개 입양을 하였으니 주위에서 관심과 사랑으로 돕자고
하든지 어는 분이 소년소녀 가장의 후견인으로 결연을 맺었는데 교회가 물질적으로 지원을 하자든지 언제 지체 부자유자와 소외된 이들의
요양소를 찾아 교회의 이름으로 섬길 기회가 있으니 뜻이 있는 이들은 미리 미리 시간을 계획하여 참석할 수 있도록 하자든지 애매히 이러저러한
명목의 헌금보다는 교회 공동체의 어느 가난한 지체를 돕기 위해 목적헌금을 하자고 해야 할 것이며 최소한 사용 내역이라도 투명하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중산층의 고상한 삶을 위해 매춘업소를 쫓아버리자고 외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악덕 포주의 횡포속에서 돈버는
고깃덩어리로 취급당하며 삶이 유린당하는 매춘 여성들의 탄식을 들어야 합니다. 차라리 네덜란드처럼 국가가 포주가 되고 정당한 세금도 거둬들이며
보호해주어 실수로 잘못 발을 들인자도 쉽게 그 길을 돌이킬 수 있게 하고, 경제적 문제로 하는 수 없이 그런 삶을 선택하더라도 비싼 값에
안전하게 몸을 팔고 돈을 모아 하루 빨리 그런 생활 정리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책임있는 다수요 세리와 창기를 가까이 하신 예수를 주로 모신
교회가 지지해야 할 정책이지 아닐까요?
그 일이 너무 멀다 싶으면 대형 교회마다 앞다투어 수련관이다 뭐다 하며 부동산에 투자에
투자를 거듭할게 아니라 “보호가 필요한 여성들을 위한 쉼터”의 역할을 하는 단체들을 지원하는 데 그 힘을 써야 하지
않나요??
원조교제가 판을 치는 세상을 정죄하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그 배경중에 하나로서 빈부차로 인한 좌절과 상대적
빈곤감이 물질주의의 만연으로 청소년들에게 현실감있게 느껴지게 된 현실 - 교복자유화, 신발자유화로 빈부차가 외양으로 드러나게 되었으며
더욱이 핸드폰이나 외제 학용품과 같이 이러저러한 물질적 이기를 생각없는 부모들이 마구 사줌으로 인해서... - 을
직시하고 성도들이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해주는 눈먼 사랑에서 벗어나 슈바이쳐 박사가 어린 시절 가난한 친구들을 생각해서 좋은 옷을 부러 입지
않은 정신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의 정신으로 계승하도록 훈육할 것을 도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교회가 이 나라의 제일가는
교회라는 일등주의에 빠져 있는 강남의 사xx 교회에도 매춘여성을 위한 피신처를 제공하는 아름다운 일이 있으나 그 부자 성도둘,
집사중에는 거래처에 뒷돈과 여성과의 잠자리 대접을 공공연히 요구하는 이들이 있다하니
우리교회가 더 큰
교회, 제일가는 교회가 될 것을 바랄 것이 아니라, 진실한 교회 더 낳은 교회의 모습을 찾기 위해 좋은 모델과
정직한 비판을 받아들이고 늘 자신을 개혁하기를 힘쓰며 각자의 삶의 처소에서 바르고 빛된 삶을 사는 한사람 한사람이 모인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상류층의 상당수가 교회에 적을 두지만 대부분 세금을 포탈하고 가난한 자의 혈세로
마련된 공공시설들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간접세보다는 직접세와 누진세의 비율을 높여 부의 공정한 재분배에 기여해야하고 몇 몇
사람의 영웅적 헌신으로 인한 구제 사업보다 정부 주도로 제도화 하여 항구적이고 안정적으로 약한 이들을 돕고 개별적 구제사업으로 인한 부패의
소지를 막아야 할 주요 책임을 신앙을 가진 정치인들이 망각하고 겨우 꽃동네나 천사운동에 구좌 몇개 가진 것으로 자위하고 있지
않습니까?
단순히 교회 잘나가는 동료나 상사가 아닌 공정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진실함과 섬김의 정신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리더쉽을 발휘하며 땅에 것을 추구하는 경쟁과 승진 욕구가 아닌 하나님안에서 바른 노동관을 갖고 일에 임하는 직장인이 되도록 도와야 하지
않습니까?
신앙으로 인해 민족 공동체로부터 억압과 따돌림을 받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현실에 적용될 말씀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는 말씀이나 “형제나 처자를 버리고 나를 쫓으라”라는 말씀을 무지하게 도용하여 가정을 풍지박살내는 것이 아니라
피차
존경하는 부부의 도를 가질 것과 침소를 더럽히지 말고 거룩하게 할 것과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쫓으라는
말씀과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진리와 사랑으로 훈육하라는 말씀과 장로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고 순종하는 자녀를 두어 가정을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세운 자라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들이 설교를 통해 이러한 자신들의 삶의 모순과 잘못에 찔림을
받습니까? 도리어 교회나 열심히 더 충성하라는 멧시지만 남고 그 댓가로 무병장수하고 사업잘되고 자녀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등등의
돼지목에 진주 목걸이 만이 그들의 사모하는 바가 되지 않습니까?
아무나 대고 마귀의 자식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고 사람을 정죄하고
말로 죽이는 일을 다반사로 하는 교회가 사회인들이 해학적으로 사용하는 “붉은 악마”라는 용어와 싸우고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정작 세례요한과 같이 권세자의 부도덕과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부패한 권력에 빌 붙어 축복기도회나 하는 자신들을
통회해야 하지 않나요?
목사를 축복을 위한 영매로 호도하거나 그런 기복적 신앙을 가진 이들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며 자신과 교회만
바라보도록 내버려 두면서, 교회당을 신당처럼 신내리는 곳으로 신비화하여 모든 일과 장소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단군상과 싸울 것은
무엇입니까?
바른 교회의 모습을 찾기 위한 건전한 비판마저 매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과연 교회의 잘못된 관행과 가르침으로
상처받은 이들이나 염증을 느끼는 이들을 얼마나 만나 보았는지 궁금해 질 뿐입니다.
인간을 위한 신앙, 살아가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형식을 지켜내기 위한 신앙에 빠진 이들의 성경에는 마12:1-8, 막2:27 말씀이나
마5:23-26 말씀은 지워져 있을
것이외다. | |
날라리 |
네, 난 개신교에
한맺혔습니다  |
() [2002-06-21]
|
20까지 개신교도였어요. 고신요. 순복음은 물론 침례교도 이단이라고 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성장'했고요. 같은 교회 동기들은 부모님들이 집에서 라디오로 대중가요 듣는다고 뺨대기 맞는 그런 분위기였답니다.(80년대
중반)
한마디로 권사이신 집안의 어르신네가.. 교회에 안간다고 우리 어머니를 빗자루로 두들겨패고, 절에 다니시는
외할머니를 우리 어머니앞에서 '지옥에 갈 년'이라고 욕하는 집안이었어요.
우리 집안 정확히 두 패로 갈라져서
자알 지내왔습니다. 개신교도와 불신자..가 아니라 광신도인 '어르신'과 '그래도 어르신이니 이해하자...파와...정말
너무하다..우리가 종이냐..왜 맞고도 아무말 못하냐..패로 갈려져서..
목사,전도사빼고는 다 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에서,집사,권사,장로..글고 성가대 지휘자까지.. 아..저는 중고등부..가스펠송을 지도했습니다. 성전에서 어찌 망령되게 기타를
치나..말도 많았죠.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제자..'가 제 18번이었군요.
고향(정확히는 아버지의 고향,경북 어느곳)에서는
예수쟁이 그 '어르신'땜에 말아먹은 집안이라고 유명한 집안입니다.
없는 살림에도 그 '어르신' 다니는
성결교회에 성전건축이다 뭐 있으면 빚을 내서 돈을 부쳐드려 야 하고요.
명절때에는 제사는
안지내고..어른들끼리 제사지내자말자,추도회로 하자,,이놈의 시끼 감히 어쩌구로 치고박고해온 집안임다. 명절날만되면 식구들끼리
쌍욕하며 밥상 뒤엎고 울고 불고하는 거 매년 봐오는 그 기분 아십니까? 오로지 그 놈의 '구원받은 권사
어르신'때문에.
아침 8시에 제사때부터 11시까지 싸우고 울고 불고..이걸 매년 2회씩 해왔답니다. 며느리들 다
울고요.(높은 어느 '어르신'의 권세 에 밀려서요)..그 속에 큰집인 우리 어머니 평생토록 고생해왔습니다.
요즘은 이제
며느리도 다 나이들고 그 어르신의 '권세'가 약해지니 좀 평안하군요.
아..그래도...그 '어르신'은 천당갈겁니다. 성경
읽을려고 뒤늦게 한글을 깨치신분.. 목사님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시는 신실한 믿음을 가지신 그 분...천당
가셔야죠. 글고..어쨌거나..어쨌거나..죽어도 교회는 못가겠다...그 '어르신'에 평생동안 당해온 걸 생각하면 죽어도 교회는
안간다는... 며느리들은..지옥 가야죠.
예수 안믿으면 지옥밖에 없잖습니까. 그렇죠. 그러한 공의의 하나님
여호와와..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자 죽음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께..경배를...
OK? | |
안오성 |
"복음을 사랑하는 님" 동감과
반감..  |
() [2002-06-20]
|
님이 아내에게 하는 교회문제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저의 그것과 유사하군요.
저도 잘못된
목회자, 성경해석의 권하을 목회자에게 위임하여 그를 통해 주의뜻을 찾고자 하는 일반 평신도들을 호도하고 억압하는 설교를 라디오를 통해 들을 때면
불길같이 분노합니다. 저의 아이들이 유일하게 아빠가 화내는 모습을 보는 순간이죠..
저도 이 지나친 분노를 넘어서야 온전히 사람을
섬길 것이라는 아내의 말을 옳게 여깁니다.
그러나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주를 섬기는 분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소위 먹사들뿐 아니라
성기문 님이 기사중에 밝힌 일반 목회자님들의 설교와 대화중에도 또는 평신도들이 잘못되이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매개의 대상으로 목회자를 인신하는
것을 은근히 용인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미 교회생활 오래된 평신도 사이에서는 목사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마음의 안전장치를 해두고 있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론 불신의 모습으로 비췰 수 있으나 목사님이 지적하시는 것과 같이 주의 종을
비판하는 마음을 갖지 않기 위해 애써 목사도 불완전한 인간이려니...하며 이해하는 맘을 늘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마음이 시험에 들지 않기
때문이죠...
지방을 전전하며 바른 목회자를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한 스무 교회를 헤매야 겨우 다른 사람을 데려와도 부끄럽지 않을
교회를 찾을 수 있더군요..
저의 후배와 동기들은 제가 정하고 다니는 교회를 묻고 고마와 하고 다닙니다.
이런 비판이
교회를 무너뜨릴가요??
바른 비판으로 평신도도 바로 보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독교내에도 스스로 바른 모습을 찾으려는
정직한 모습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부패로 인해 우려하는 많은 일반인들에게 오히려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목사의 지위남용은
차치하더라도 목사는 어찌되었든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고 그 가르치는 자들이 지식폭력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의 삶을 황폐케하고
오히려 지옥자식되게 할 수 있음을 예수님이 경고하지 않으셨읍니까?
이런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이런 일을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고 엄중히 경고치 않으셨습니까?
이곳엔 치우친 주장도 있고 온건한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이죠... 님과 동일합니다.
지금의 성기문님의 글이 지나치다 하십니까?
정당하다 생각되고
글가운데 안타까움이 서려있어 저는 보기 좋았는데요...
오히려 이 정도의 비판에도 뉴죠를 매도하는 님의 모습이
슬픕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상을 뒤엎지 않으셨던가요?
님과 모양은 달라도 한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쓰기는 마찬가리라 생각됩니다.
뉴죠를 매도하기보다 치우침이 없도록 님의 온건한 정신을 가끔씩 들러서 일깨워주시는 배려를
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