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S. Lewis의 일곱 가지 악과 선 - 제라드 리드
악 - 교만, 시기, 분노, 호색, 탐식, 게으름, 탐욕
선 - 분별, 정의 용기, 절제, 믿음, 소망, 사랑
교만은 모든 악 중에 가장 으뜸 되는 악이다. 철저히 반 하나님적인 마음의 상태가 교만이며, 교만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 그것의 교만의 상징일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시기는 질투와 다른 방식의 표현이다. 이는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한탄하는 모습이다. 뿌리를 교만에 두고 증오의 꽃을 펴 생겨나는 것이 시기인 것이다. 자신의 위치에서 합당한 일을 거두어 내는 것,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고 다른 위치(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시기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잠 14:30)
분노는 선한 분노와 악한 분노로 나뉜다. 선한 분노는 거룩한 사람들의 표시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합당한 이유로 분노한다면 그 분노는 칭찬 받아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악한 분노는 대체로 이기적이며 악하다. 악한 분노의 문제는 다른 사람들을 해롭게 하려는 증오심에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호색은 정상적이고 건전한 성적 욕망이 아니다. 사람을 물건으로 보고 성욕을 상상할 때 쓰이는 것이 호색이다. 쾌락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만연해지고, 당연해진 것이 호색이다. 호색은 상대를 교묘히 비인격화시키며, 사랑을 갈취한다. 절제할 때 호색을 물리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살전 4:3~7)
탐식은 죄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탐식을 먹고 마심에 무절제한 욕망이라고 규정했다. 그레고리는“급하게, 사치스럽게, 너무 많이, 탐욕스럽게, 까다롭게”먹는 것이 탐식이라고 보았다. 호색과 마찬가지로, 탐식도 창조의 선함을 남용, 오용한다. 탐식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권리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선한 자는 살기 위해 먹지만 악한 자는 먹기 위해 산다”(잠 13:25)
게으름이 죄인 것은 다수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편안한 감상주의, 냉소주의로 안착하려는 우리들의 삶이다. 이는 영원한 문제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사람이 도덕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게 할 진지한 생각과 임무를 회피하려는 그릇된 욕망이 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25)
탐욕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말한다. 탐욕은 일시적인 꿈이나 생각만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비록 마음으로일지라도 구체적인 단계를 밟아간다. 호색이 그렇듯, 생각 속에서 번진 욕구를 실현하기로 작정하는 것이 탐욕이다. 탐욕은 사람으로 인색하게 만든다. 인색한 자는 성도가 아니고, 성도로 인색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치명적인 죄악인 탐욕인 것이다.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분별은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분별은 시작한다. 또한 분별의 기초는 정확한 기억이다. 또한 분별을 배우기 위해 마음을 열어 놓고,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가 요구하는 바를 기꺼이 순종할 수 있을 때 분별은 생겨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벧전 1:13)
정의는 공정한 것이다. 하나님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그분꼐서 만드신 것을 존중할 때 정의가 발산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용기는 모든 덕의 형식이다. 불굴의 정신이란 두 종류의 용기를 말한다. 위험과 맞서는 용기가 그 하나요, 고통 아래에서 끝까지 견디는 용기가 또 하나이다. 용기는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게 한다. 또한 이유가 정당할 때 목숨을 건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절제는 삶의 모든 면에 적용되며, 모든 것이 적정한 자리에 있도록 질서를 부여한다. 성령의 능력을 받는 거룩한 사람들은 그들의 온전함을 유지하는 힘을 절제에서 찾는다. 또한 절제는, 우리의 삶에 유익이 되는 한도 내에서만 쾌락을 취한다는 뜻이다. 음란, 방탕, 교만, 무분별한 분노, 탐욕은 무절제의 표본들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고전 9:24~27)
믿음은 굽힘 없는 신앙의 능력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사람을 구원한다. 그리고 바로 그 믿음으로부터 선한 행동이 나와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믿고, 우리 스스로가 구원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약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우리의 신뢰를 통해 이 믿음은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참된 믿음, 구원의 믿음은 ‘진리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그 말씀을 실행한다.
소망은 하나님 안에서만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상처로 아픔이 뒤덮여 있더라도 하나님께 있는 소망은 회복이 가능하다. 사탄은 우리를 세상 것들에 과도하게 매달리게 함으로써 소망을 일소하려고 한다. 그러나 거룩한 소망은 세상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사랑은 초자연적인 덕목 중 하나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습관이며, 이습관으로 사람은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신다.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덕성스러운 삶의 절정이며, 거룩의 윤리의 중심화음이다. 사랑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다(요일 4:8).하나님은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감싸주신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