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작성자 : 김준기 목사
뜻이 있는 몇몇 목회자들이 함께 독서 토론 모임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되었다. 마침 한 목사님이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을 추천해서 그 책을 가지고 토론을 하게 되었다. 그 책을 미리 읽으면서... 차라리 일반적인 자기 계발서라면 이해하고 읽어 주겠는데,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처럼 여겨지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고, 일반 성도는 물론이요 목사들까지도 환호하며 읽는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고 화가 났다.
목사 모임을 하면서 이 가르침이 지나치게 편중된 가르침이요 결코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하며 지적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대다수가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그것이 실제로 성도들에게 효과가 있는데!”라고 반응하는 데는 힘이 쪽 빠졌다. “효과만 있으면 된다”는 실용주의(Pragmatism)적인 사고가 잘못된 것이라는 또 다른 논쟁을 일으키기가 벅찼기 때문이다.
사실 긍정의 힘을 토론하기 몇 주 전에 서점에 나갔다가 [부족한 기독교]를 발견했지만 잠시 살펴본 후에 그냥 내려놓았었다. 일단 저자가 평신도라는 것과 ‘심리학이 과학인가’하는 쪽에만 국한된 논지가 구태의연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사 모임을 하는 후배 목사와 개인적인 대화 중에 “이런 책도 나왔더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그 후배 목사가 긍정의 힘을 토론하는 첫 시간에 그 책을 가지고 왔길래 다시 훑어보다가 관심이 생겨서 구입을 하게 되었다.
저자와 백금산 목사님의 이메일 내용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흥분도 했고 한 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평신도인 저자가 “사람들의 눈에 좀 더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치”(18p)고 “‘성경이 전하는 진리가 무엇인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오로지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저들을 만족시킬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18p)는 교회의 모습을 지적하는 것을 보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여기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한국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16p)고 말하면서 ‘자격’이 없지만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런 책을 쓰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부끄러웠다. 저자와 거의 비슷한 문제의식과 고민을 가지고 있는 목사로서 이런 글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한국교회의 한 목사로서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조그마한 시도조차 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제 책을 보면서 생각했던 것들 가운데 몇 가지만 추려서 써보겠다.
‘01 심리학은 과학인가, 종교인가’라는 장에서 저자는 ‘진화론은 과학인가 - 무엇이 과학인가 - 심리학이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 등을 다루면서 “심리학이 과학으로 인정받게 될 때만이 비로소 기독교가 심리학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58p)에 심리학이 과학이 아니라는 점을 다룬다고 지적한다. 물론 그런 부분도 필요하다. 하지만 좀 더 실제적인 부분을 다루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목사들조차 ‘심리학이 과학이니까...’라는 생각보다는 ‘그것이 목회 사역에 있어서 실제로 효과가 있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학은 과학인가’하는 것도 좋지만, 이 ‘실용주의적 사고’가 잘못이라는 점도 함께 다루었다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교회와 목사가 ‘효과가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인가?’에 더 관심을 갖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02 기독교 심리학은 존재하는가’에서 저자는 ‘현대 기독교 상담을 대표하는 두 사람’인 게리 콜린스와 제이 아담스를 소개하면서 게리 콜린스의 입장을 비판한다. 그리고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심리학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라는 말에 해당되지 않는다(74p).”고 말한다. 하지만 ‘과학적 진리’만 ‘진리’인 것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진리의 조각’도 진리이다. 다만 그 ‘조각’을 통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구원과 무관한 진리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기독교 물리학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듯이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말도 사용될 수 없(79p)”다면서 “기독교 물리학, 기독교 생물학이이라는 말은 없”다고 논증한다. 하지만 동일한 논리로 말한다면 ‘기독교 미술, 기독교 음악’도 없다고 해야 하는가?
저자는 데이비드 시먼스에 대해 비판하는데, 사실 시먼스의 첫 번째 책인 [상한 감정의 치유]는 한국 교회에 ‘내적 치유’가 시작되는 도화선을 당긴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주장해 온 ‘구원’ 외에 ‘내적 치유’가 필요하다는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책이다. 저자의 “시먼스는 심리학 이론으로 성경을 잘못 적용하고 있다(86p)”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실상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적용의 문제는 심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분을 지적하고다루는 것은 ‘편협’한 행동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편, 저자는 정당한 지적과 함께 조금 지나치게 여겨지는 비판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게리 콜린스는 주술이나 점성 요법도 인정한다(93p)”는 소제목이 그렇다. 정작 본문은 “신비적인 주술, 점성 요법 등에 대해서까지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인정한다’와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준다’는 분명 다른데도 불구하고 ‘인정한다’라고 확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곤란하다. 더군다나 그 아래에 인용된 콜린스의 글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글과 주장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지 콜린스 자신이 그것을 인정한다든지 용인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면에서 보면, 백금산 목사님이 저자의 메일을 보고 “데이브 헌트에 대한 책을 분별해서 보고 있다니(33p)”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많은 경우 ‘극단적’인 비판을 하는 데이브 헌트의 영향력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본인은 1991년과 1992년에 데이브 헌트가 쓴 [기독교 속의 미혹]과 [미혹을 넘어서](포도원)를 각각 읽었는데, 거기에는 정당하게 인정할 수 있는 비판 뿐 아니라 극단적이고 지나쳐 보이는 비판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면서 보았었다. 그의 비판을 그대로 따른다면 현재 기독교 지도자의 90% 이상은 다 문제가 있다고 정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판을 하되 그것을 극단적으로 끌어 들이는 것의 위험성을 의식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사실 ‘내적 치유’라는 주제가 나오기 시작하던 초기부터 그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책을 읽어왔지만, 어느 때 부터인가 그 주장에 들어있는 ‘극단적’인 부분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한다면 과연 ‘성인 아이’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며 ‘역기능 가정’이 아닌 가정이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생각, 내적 치유를 한 번 받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오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등을 생각해보면 과거로부터 존재해왔던 신앙 훈련과의 차별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내면, 기억, 상처’ 등에 대한 내용들이 새롭기는 하지만 그것도 결국 ‘용서’라는 주제를 확대한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주서택 목사)의 이러한 피상적 구원 이해는 ‘우리가 비록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또 한 번의 무엇인가가 필요한 존재다.’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게 되어 결국 구원의 이원론에 빠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105p)”라고 지적하는 것은 참으로 옳다. ‘복음’과 ‘구원’의 영향력과 능력을 축소시켜서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한 듯, 모든 성도가 내적 치유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구원에 대한 피상적 이해’에서 오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처럼 ‘구원’으로 충분한가? 하는 지적은 ‘내적 치유’만의 독특한 문제 제기는 아니다. 사실 오래 전부터 ‘제2의 축복(second blessing)’에 대한 논쟁이 있어왔는데, 이것 역시 구원에 ‘+a’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요 오늘날 ‘내적 치유’가 이야기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주장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으로, ‘구원’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임을 알고 확신해야 한다.
저자가 “기독교 심리학은 인간의 가장 긴급한 문제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내면의 치료라고 생각한다(99p)”고 말하는 것 역시 이중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구원’을 ‘치료’로 바꾸려는 현대적 추세에 대한 지적이라면 마땅히 동의해야 하는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내면 치료’가 ‘구원’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대체’하려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03 왜 심리학은 반기독교적인가’에서 저자는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116p)”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심리학을 과학도 아니요 반기독교적 사상으로 ‘몰기’ 위한 지나친 주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심리학이 과학이 아니고 처음 시작부터 인본주의자들이 관여했다고 해서, 그리고 그것이 인간을 대상과 중심으로 한다고 해서 반드시 반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대 과학의 뿌리인 근대 과학이 대부분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되고 형성되었다고 해서 ‘과학’은 친(親)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신학은 무조건 친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저자는 “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인간 본성의 선함 혹은 중립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반기독교적이다(120p)”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저자 자신이 인정하고 있듯이 모든 심리학이 ‘성선설’ 또는 ‘중립설’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근원적으로 악한 존재로 보았습니다(132p)”는 저자의 말대로라면 프로이트는 친기독교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일까?
저자가 프로이트를 다룬 소제목 가운데 그가 ‘무의식’을 ‘발견’했다(123p)는 표현이 있는데, 본인은 그 표현에 동의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무의식을 ‘발견’한 것이다. 시각의 차이에 따르는 논쟁이 있지만,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하는 표현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일하게 헤겔의 경우에도 ‘변증법’을 ‘발견’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리적인 ‘신대륙’이나 정신적인 ‘무의식’, 그리고 역사 속의 ‘변증법’을 기독교인이 발견했든 무신론자가 발견했든 그것이 무에 그리 중요한가? 그들의 사상과 행동 등에 따라 조금씩 왜곡되기도 하고 했지만 그것 자체의 ‘존재’를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모두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04 심리학이 쓴 세 개의 가면’에서 저자는 ‘자기 사랑’과 ‘긍정적 사고방식’ 그리고 ‘성공의 법칙’을 다룬다.
먼저 ‘자기 사랑’ 부분에서 저자는 ‘카를 융 - 에리히 프롬 - 칼 로저스’에 이르는 계보를 소개한다. 자기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성경에 확실히 등장한다는 주장(170p)이 잘못(174p)이라는 것과, 성경은 하나님을 자랑할 것(176p)과 자기 사랑을 죄(179p)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전체적으로 동의한다. 특별히 ‘용어 사용’에 대한 지적(164p 각주 83번)은 전적으로 옳다.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의미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런 면에서는 ‘분석 철학’적인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사상을 나누고 대화하기 전에 먼저 용어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편, 저자는 위에서 소개한 융, 프롬, 로저스의 이론 등을 반박하기 위해서 종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그의 사상이 성경에 근접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의 주장은 받아들일만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모든 심리학이 반기독교적’(116p)이라던 자신의 주장에 모순되게 행동한다. 모든 심리학이 반기독교적이라면 심리학자인 제임스의 주장도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필요한 부분에서는 슬며시 심리학자의 주장을 차용할 것이 아니라, 심리학이 이 모두 반기독교적인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더 났다.
둘째로 ‘긍정적 사고방식’ 부부에서는 ‘노만 빈센트 필의 적극적 사고 - 로버트 슐러의 긍정적 사고 -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 그리고 그들의 원조 격인 나폴레온 힐’에 대해 소개한다. 이 부분은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주장이 ‘심리학’에 근거를 둔 잘못된 것이라는 지적이 되어져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이 주장이 “성경을 왜곡한다(242p)”는 점이 가장 강조될 필요가 있다. 반쪽의 진리, 혼합된 진리가 더 위험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효과’가 있느냐가 아니라 ‘성경적’이냐를 기준으로 삼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로 ‘성공의 법칙’에서는 ‘자연 종교와 초자연 종교 - 뉴 에이지 - 말과 상상’등을 이야기한다. 특별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에서는 박필 교수의 ‘말’ 시리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영적 기적의 법칙’에서는 ‘상상하는 대로 된다’는 주장에서 브라이언 트레이시, 오그 만디노, 나관호 목사 등의 예로 들고 있다. (모두가 실명으로 거론되는 와중에도 조용기 목사의 경우에는 “한국의 어떤 유명 목사(281p)”라고 슬쩍 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최종적으로 “성공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주의 종교에 깊게 물든 기독교(301p)”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그렇다! 기독교는 자연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연 세계의 ‘법칙’의 규제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것이 말이든, 상상력이든... 하나님도 꼼짝 하실 수 없는 ‘성공의 법칙’이란 없다.
저자는 ‘05 성경은 참으로 충분한가’를 결론으로 제시한다. ‘우리가 성경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3가지 오해’나 “성경의 충분성을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깊고 넓게 그리고 간절히 읽어야 한다(320p)”는 결론적인 이야기는 충분히 교훈적이다. 하지만 왠지 흐지부지 끝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어지는 2부 3부를 염두에 두고 그런 것일 수 있겠지만... 결론을 꼭 이쪽으로 가지고 가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심리학이 아니라 성경!’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의도는 알겠지만... 단순히 ‘성경의 충분성’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가르침을 능가하는 성경의 충분성’쪽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위에서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을 지적하기는 했지만... [부족한 기독교]를 읽어가는 내내 가슴이 벅찼다. ‘동지’를 발견한 기쁨 때문이다. 앞으로 나올 2부와 3부도 기대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바른 길, 진리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작가들도 많이 발굴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