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Lewis의 일곱가지 악과 선 中 교만
1 .교만 - 철저히 반 하나님적인 마음의 상태
기독교 신앙의 스승들에 따르면 근본적인 악덕, 최대의 악은 교만이다. 교만은 다른 모든 악덕으로 이어진다. 교만은 철저히 반 하나님적인 마음의 상태이다. 속에서 크는 그것이 하나님을 밖으로 밀어낸다. 그리고 거기가 교만의 자리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교만은 인간이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만은 수퍼비아라고 부른다.” [토마스 아퀴나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본래 모습보다 더 낫게 보이고자 한다. 아퀴나스의 결론에 의하면 “자신의 한도를 넘으려 하는 사람은 교만하다”
궁극적으로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창조자인 주님을 떠날 때부터 시작된다. 교만은 죄가 솟아나는 샘과 같아서, 그 샘을 버리지 않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사악함으로 가득 차게 된다.”
교만한 사람은 우주 왕복선처럼 날아, 궤도를 그리며 하나님 위를 비행하고자 하며, 하나님의 길보다 자신의 길을 더 좋아한다. 루시퍼를 부추겨 하늘을 떠나게 한 죄,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에덴의 지복을 상실하게 한 최악의 죄가 바로 교만이다.
“결국은 두 종류의 사람들 밖에 없다. 하나님께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네 뜻대로 하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다.” -C.S 루이스
죄의 가장 깊은 뿌리는 “천국에서 섬기느니보다 지옥에서 다스리고 싶어하는 교만”이다.
“지옥의 유일한 원리는 ‘나는 내 것이다!” - 조지 맥도널드
“철저히 반 하나님적인 마음의 상태”인 교만은 뭔가에 찬성하기보다는 반대한다. 악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 결여된 상태이다. “말하자면, 선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악은 선이 훼손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분명히 선한 어떤 것이 먼저 있고 나중에야 그것이 훼손되었을 것이다”
“악은 기생충이지 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악은 “나를 앞에 놓고 중심이 되고자, 하나님이 되고자”하는 그곳을 출처로 삼는다.
교만은 자랑과 과시라는 면도 물론 있지만, 하나님의 엄격한 뜻을 피하고자 그 분을 회피하고 벗어나려는 태도를 우선 보인다. 루이스가 이해한대로, 교만은 우리를 서로 다투게 한다. 부모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는 세살배기 어린애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게 한다. 교만은 인류 최초 부모의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결심의 재현이며, 어거스틴의 말대로 ‘하나님을 경멸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어둠이 빛을 차단하듯 죄는 거룩함을 차단한다. 이 성스러움과 죄는 둘 모두 어떤 특정 행위라기보다는 존재 상태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싫어할 때 우리는 교만하게 된다. 이러저러한 중독증의 포로이면서도 내가 알아서 조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교만한 것이다. 일인자가 못되어 안달할 때 우리는 자기의지에 탐닉하고 교만하게 된다. “피조물의 입장에서 이 자기의지의 행위는 피조물의 본분을 망각한 중대한 오류이며, 인류 대타락의 원인이며 유일한 죄이다. ”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의 권능을 거절하는 우리는 훼손되고 비틀린 권력(프로메테우스적인 권력)을 추구한다. 우리는 특히 다른 사람들-가족, 학교, 교회, 나라-에 대한 지배력을 갈망한다. “자신의 권력에 극도로 취한” 교만은 “더 높은 권위에서 오는 더 정당한 통치를 경멸한다”고 어거스틴은 말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함은 아버지께 순복함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그분의 의지 아래 둔다. 이는 자기의지, 자기추구, 자기주권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남편, 직장상사,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순종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는 교만을 꺾는 작은 단계이다.
말을 길들일 때 유능한 조련사는 작은 단계부터 시작한다. 우선 고삐를 매고, 다음에는 안장을 얹고, 천천히 끌고 다니다가, 안장 위에 좀 무거운 것을 얹어보기도 하며, 마침내는 올라탐으로써 말 안 듣는 야생마를 꺾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를 꺾는다.
언제나 최선을 대했다는 태도를 취할 때, 자기 몫이 아닌 것은 결코 바라지 않겠다고 고집할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도, 위에서 선물도 주는 구원도 다 필요 없다.
가장 교활한 형태의 교만은 거룩한 체 하는 영적인 교만이다. 겸손한 체 하는 것은 최악의 교만이다. 완벽한 체 하는 사람들은 가장 타락이 심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에 맞서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신앙이 우월하다고 느낀다면, 마귀는 단연코 우리 편이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이 계심을 삼가 헤아린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잊는다. 우리가 남보다 낫다는 생각은 결코 할 수 없다.
보통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의식, 선택된 영적인 무리의 ‘일원’이라는 기쁨은 사탄이 차려주는 유혹의 식탁이다. 이 식탁 앞에서 우리는 ‘핵심그룹’의, 선택된 무리들의, 엘리트 집단의 특히 ‘영적인’ 무리들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갖는다.
결국 교만은 우리를 눈멀게 한다. 남보다 높은 데 있어서 승리인 것 같지만, 그 때야말로 우리는 ‘승리’에서 가장 멀리 있다. 그리고 무엇인 체하는(예를 들면, 겸손한 체하는) 우리의 위선은 정확히 파고들면 뻔한 것이다.
자율적 개인주의는 세속 사상가들이 그토록 빈번하게 제창한 ‘인권’운동의 비옥한 토양이었지만, 결국 합리화된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교만은 물론 개인에게 감염되지만, 특히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쉬운 다양한 집단에도 감염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집단의 ‘핵심 일원’에 들고자 하는 욕망은 더더욱 위험하다. 사실, 루이스의 죄 개념 이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핵심 인원’이고자 하는 이 욕망이다. 사람들의 여러 집단에는 두 계급이 존재한다고 그는 말한다. 서열과 지위를 통해 외부적으로 드러난 계급과 내부자들로 구성된 보이지 않는 계급, 이 내부자들, 곧 핵심 일원들은 자기들끼리 말하는 독특한 방식이 있으며, 늘 다 안다는 듯한 거만한 시선과 윗사람에게 아랫사람에게 가혹한 속물근성을 가지고 있다. 핵심 일원이라는 이 지위는 대단히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그 당사자들을 교묘히 타락시킨다. “아직 나쁘지 않은 사람을 악행에 빠뜨리게 하는 가장 교묘한 기술을 가진 것이 바로 핵심 일원에 대한 욕망이다”
내각, 교단 총회, 교수 협의회 같은 집단에 들어갈 경우, 쉽사리 그 위상으로 인한 우월감에 빠질 수 있다. 심지어 시민단체나 인권 로비 단체들도 권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은연중 교만에 젖어들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진실을 가리며 상대를 누르기까지 한다. 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비젼을 끊임없이 강요하는 이 ‘세계 변혁자들’의 교만에 비하면 기껏해야 외모의 자랑인 여자들의 교만은 아무것도 아니다.
루이스의 통찰을 극구 기리는 현대 철학자 피터 크리프트는 이렇게 말한다. “교만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예는 영화배우들이 아니라 독재자들이다. 영화배우들은 자랑하지만 독재자들은 교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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