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소재

참자유 - 새들백 교회 이야기

ToBeIsToChange 2006. 5. 2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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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백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교회들이 있다. 교회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을 수 있지만 그 교회들은 분명 다 다른 교회들이다. 서로 다른 그 교회들 중에 유독 관심의 대상이 되는 교회들은 안타깝지만 결과적으로 그 교회가 이루어낸 '성장' 때문이다.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는가? 이것은 내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회에 관심을 가지는 가장 주된 이유인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런 가장 단순한 이유에서 '새들백교회이야기'를 읽는다. 성장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새들백교회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독서법은 대단한 내공의 '자의적 해석'을 가졌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교회의 성장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은 무엇인가?

'교회의 성장은 여러가지 측면이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무엇에든 대표적인 준거의 잣대가 있기 마련이다. 여러가지 측면을 아무리 드리댄다고 해도, 성장은 결국 '양(量)'의 잣대가 대표적인 준거틀이다. 양적인 성장을 제외한 교회의 성장은 이야기할 수 없다. 질적인 성장은 반드시 양적인 성장의 흐름을 전제해야지만 가능하다. 양적성장이 없는 질적성장을 상상할 수 있는가? 기독교 신앙에서 그런 일은 모순이다. 교회의 성장 또한 그러하다. 신약 성경에서 발견하는 거의 최초의 교회 성장은 '그 수가 ~ 더하더라'라는 평가로 발견된다. 초기 기독교사 또한 양적인 성장으로 서구제국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양적성장은 모든 종류의 질적성장의 또다른 표상이며, 최종적인 귀결이든지 혹은 선도하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그 어떤 다양한 기준을 가지고 와서 양적성장의 측면을 가린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성장의 양적 측면은 결코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양적성장이 지지부진한 교회에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적성장을 발견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말을 하는 자를 결국은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성장의 동인은 무엇인가?

'새들백교회이야기'는 굳이 질적성장을 변호하지 않는다. 그 교회는 이미 눈에 띄는 양적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새들백교회이야기의 당당함은 그 교회의 성장에 관한 동인을 스스로 내세우는 책들의 출간으로 표현되었다. 우리 또한 그 교회의 성장의 당당함과 미학에 부러워하고 있다. 교회의 차원에서 그 책을 읽는 것도 바로 그들에게서 본받을 바 가장 확연한 양적성장이 그 교회 미학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성장으로 당당한 자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러저러하여 이렇게 컸노라'라고! 새들백교회는 이야기한다. '목적(purpose)'이 그들의 성장을 이루어냈다고. "참으로 불경하다. 자라고 키우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어찌 목적을 자기 성장의 요인으로 말한단 말인가?"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그들의 성장이 너무도 당당할 따름이다. '새들백교회이야기'는 사후적으로 쓰여진, 후방향적인 자기 성장의 평가서이다. 어느 교회인들 하나님의 키우심을 전제하지 않고 성장을 이루겠는가? 그것은 논외의 대전제이다. '새들백교회'의 목회자는 자기 교회 성장의 동인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목적(purpose)'를 내세우고 있다. 그 교회의 성장보고서를 읽으면서 성장의 동인으로 본받기 원하는 것은 저자 스스로 내세우는 바 '목적' 바로 그것이다. "뚜렷한 목적이 구체적인 성장을 이끌어낸다."라고 저자는 당당하게 말한다. 목적을 통해 이루어 놓은 이 아름다운 교회를 보라고!


목적은 무엇인가?

'새들백교회이야기'는 잘 쓰여진 책은 아니다. 자신이 내세우는 개념에 관하여 제대로 된 정의 하나 내리지 않고 막연한 이야기로 채워뒀기 때문이다. '거시기가 거시기' 식으로 '목적이 목적'이라는 말을 한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독자들은 힘들게 노력해서 줄간 사이에서 발견되는 '목적'을 찾아서 뜻매김해야한다. 줄간에 숨긴 목적의 성격으로 분명한 것은 그것이 매우 구체적인 그 무엇, 전술이나 전략이라는 군사적 개념으로 대체하자면 일련의 일관성을 지닌 전술과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에서 극도의 모호한 개념인 '비전(vision)'과 대치되기도 하는 새들백교회이야기의 목적은 한국교회가 말하는 류의 비전이기보다는 일종의 기업 세계에서의 비전과 유사하다. 이 책이 목적을 이야기할 때, 그들의 목적은 '명확하고 특화된 그 무엇'이다. 표방되어 사람들이 듣게 될 때, 행동의 지침으로 구체성을 띠는 어떤 목적을 말한다. 거대한 전략 - 그것을 총체적인 개념의 기독교의 선교확장이나 교회의 성장으로 보자면 - 아래 일관성의 띠로 묶여 있는 전술의 뭉치로서의 목적이다. 이 목적에서 주목해야되는 가장 분명한 성격은 '모호하게 말하지 않기'이다.

교회성장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이 책은 자주 '피터 드러커'를 이야기한다. 경영학을 공부하는 나로서는 새들백교회이야기의 저자가 목적(purpose)를 이야기하면서 목표(objective)를 경영 전면에 내세우면서 경영의 세계에 엄청난 기여를 한 피터 드러커와의 동일시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피터드러커는 목표경영(MBO ;Management By Objectives)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목표는 명확해야한다고 강조한다. 목표는 너무도 명확하여 그 목표를 주지 받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행동지침으로서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평가에 관해서도 목표를 통해서 이야기해야하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뚜렷한 목표는 경영의 가장 중대한 개념이다. 릭 워렌(저자)이 피터드러커의 '목표(objective)'를 유사한 단어 '목적(purpose)'로 대체시켰을 뿐이라면 과도한 해석이 될까? 그렇지 않다. '새들백교회이야기'를 세세하게 읽어보라. 릭 워렌은 새들백 성장의 신화를 철저하게 세세한 '목적(purpose)'를 통해서 사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왜 새들백을 읽는가?

앞서가는 주자, 성장을 이룬 자는 당당하다.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이야기하고, 그 성장을 따라가기 원하는 사람은 그들의 비결을 세세하게 읽어야 한다. '새들백교회이야기'는 바로 그런 비결의 뭉치들이다. 책의 원제목 - The purpose driven church - 이 당당하게 표방하는바 '목적'이 성장의 핵심비결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 그 목적에 대한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 신앙의 일반적인 개념의 하나로 교회의 일반적인 목적으로 이 책의 목적을 읽지 말라. 그것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의 오해에 불과하다. 책을 세세하게 읽어보라. 그것은 교회성장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일종의 경영신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안타깝게도 후발주자인 교회들은 이 선두주자의 성장신화의 경영학을 읽고 해석해야하는 것이다. 책을 펴고 읽는 순간, 이 책은 목적을 중심에 놓은 교회성장의 비결이 눈에 들어오기를 강요한다. 그것을 피할 수 없다. 피하지도 말라. 그것을 피하면서 '새들백교회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학대다. 차라리 책을 읽지 말아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고 싶은가? 그렇다면 겸허하게 후발주자로서 앞서 나간 자의 당당한 거드름에 굴복하라. 그리고 세세하게 그들의 비결을 줄간에서 발견하라. 선택은 오직 둘 중 하나다. 읽고 발견할 노력을 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아예 책을 읽지 않던가..!


교회 성장, 막연하게 말하지도 말고 막연하게 가지도 말자

성장에 관하여 목적은 뚜렷해야 한다. 뚜렷하지 않을 바에는 목적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행동의 구체적인 지침에 되지 못하는 것은 목적이 아니다. 교회 성장의 양면은 거룩한 그 무엇으로서의 '질적 측면'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야하는 구체라는 세계의 그 무엇으로서의 '양적 측면'을 동시에 이야기해야 하는 일종의 모순(paradox)이다. 교회는 이 모순을 제대로된 자기 논리로 이해해 내야한다. 성장은 '양적 측면'으로 강하게 표방된다. 질적인 성격의 목적은 '성장'에 관해서 모호하다. 그런 목적은 성장이라는 맥락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덜 모호하다. 행동의 지침이 될 수 있는 목적을 말하는 것만이 성장의 구체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것은 안타깝게도 '양적인 성격의 목적'이다. 떳떳하게 양적 목적을 세우고 이야기하라. 새들백교회의 목적 기술서는 구체적인 수를 제시하여 그 목적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양적 목적은 질적 목적을 통해서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설득력있으며 교회의 방향과 행동에 있어서 명확해지는 목적은 양적 목적의 구체성과 질적 목표의 당당한 방향성으로 함께 가야한다. 어느 쪽의 목적이건 불명확한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말하는 사람에게 도 명확해야하며, 듣는 사람에게도 명확해야한다. 어느 한 쪽이라도 명확하게 와닿지 않는 목적이라면, 그 목적을 새로운 문장으로 알아듣게 구성해야 할 일이다.

'새들백교회이야기'는 바로 그런 명확한 목적의 건강한 조합들 위해 당당하게 자기 교회의 성장을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고 있는한 '교회성장'에서 발뺄 수 없다. 모른체 할 수도 없다. 성장은 교회가 스스로 표방하는 바 유기체적인 성격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당연히 추구할 바다. 선교적인 해석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새들백교회이야기'는 바로 그런 성장을 이야기한다. 성장을 원한다면 그들의 전철에 대한 깊은 해석을 해야 한다. 그렇게 읽든지... 아니면 읽지 말아야 할 일이다. 우리 교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 교회의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은 교인들 모두가 공감하는 바 명확한가? 그리고 교인들의 행동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평가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인가? 그런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 목적은 재기술되어야 한다. '새들백교회이야기'가 이야기하는 목적은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

 

 

http://blog.naver.com/qlibrary/40018303182

 

네이버 메일통은 거의 쓰지 않습니다. 거기 메일이 하나 와 있다고 해서 열어보니 알지 못하는 분으로부터 메일이 와 있었습니다. 아래에 퍼놓은 글이 바로 메일입니다. 굵은 글씨로 된 것은 제가 읽다가 눈 여겨봐야 할 포인트인 것 같아서 그렇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요즘 본의 아니게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과 논증(argument)과 논리(logic)을 공부하고 있는데요. 이 글은 그 공부에 있어서 부적절한 논증과 논리, 과도하면서도 억측에 가까운 상대방에 대한 가정(assumption) 등 - 이런 것들을 보통 오류(fallacy)라고 부르지요 - 이 모두 한 데 모여 있는 전형의 글인 것 같아서 공부도 된다 싶어 굵게 표시해 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의 나쁜 태도도 종합선물세트로 한 군데 다 모여 있습니다. ^^

 

이분의 글 서두에서, 안부게시판에 쓰셨다고 되어 있는데요. 네이버가 지나치게 긴 안부글은 자동으로 메일로 옮기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블로그에 쓰시려고 했던 글이므로, 쓰신 분의 의도에 맞게 블로그로 옮겨 싣습니다.

 

 

 

안녕하세요 참자유님.

 

우연히 naver.com에서 '새들백교회'를 검색했더니 님의 블로그가 검색되어져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새들백교회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다른 글들도 한번씩 읽어보았습니다. 읽으면서 드는 느낌은 한국교회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글을 읽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뜻하심이 있는 것 같아서 메일을 보내고 싶었는데, 블로그에서 바로 메일을 보낼 수 있는 기능은 없어 안부게시판에 올립니다. 먼저 오해없이 제 글을 읽어주셨으면 좋겠고, 글이 맘에 안드시거나 님의 블로그와 다른 방향이라면, 삭제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부족하지만 같이 이야기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글을 올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고 있고, 다른 어떤 이들은 부정적인 사고방식들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해져 가는 이 세상에서 부정적인 것들이 많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도 사실 전자보다 후자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무언가 긍정적으로 보려는 시도보다는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그 것을 비판할 때가 일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배들이 저에게 그런 시각을 바꾸어 볼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것 아십니까? 언제부턴가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긍정적이고, 열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보다는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더 쉽고, 좋아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나 한국사회에서는 그 것이 더욱 더 쉬운 것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미국에 살고 있지만, 가끔 한국 소식을 접할 때 마다 옛 습관인 비판을 자주 하게 된답니다.

 

저는 저의 비판으로 많은 사람들을 책망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비판으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한국에서 교회를 섬길 때 저희 부서를 놓고 실랄하게 비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한 선배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우리 공동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무릎을 꿇었는가?', '너는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섬김을 했는가?'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비판만 했을 뿐입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제가 참 잘못했다는, 세상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는 생각을 가져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그 것은 '뉴스 앤 조이'라는 사이트입니다. 제가 이 전의 비판하는 모습으로 계속 살고 있다면, 저는 그 사이트에서 삶의 절반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그 사이트를 볼 때 마다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물론 요즘의 한국교회에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한국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있습니다. '뉴스 앤 조이'는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드러내며,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것이 단지 나쁜 영향만을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묻고 싶은 것은 한국교회의 문제 이전에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가? 입니다. 그렇게 비판하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지 못하다면, 똑 같은 죄수가 서로의 죄를 두고 비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의 문제를 실랄하게 드러내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 우리가 그들의 잘못함을 하나님께 회개하며, 하나님께 무릎꿇고 있는가? 일 것 입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평가하고, 우리가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 것은 일종의 '권력남용'이 될 것이겠지요.

 

저는 제 속에 하나님 앞에 무릎꿇음도 없고, 회개하지도 않고, 그들을 위해서 중보하지도 않으면서, 제가 가진 제 머리의 잣대로 비판하는 저의 인간냄새나고 부족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아갔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간 사람들처럼...살고 있지는 않은지...하나님은 이 시대에 죄 없는 자는 돌로 치라는 새로운 말씀을 해 주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의 잘못된 모습 가운데 마음 아파하시겠지만, 그 보다 앞서 우리의 바르게 서지 못함과 우리의 죄악된 모습과 그리고 알면서 되풀이 되는 죄악된 삶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도 완전치 못하면서 그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못하고 인간의 잣대로 평가하는 그 모습 가운데도 아파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바로 님이 쓰셨던 '새들백교회 이야기'에 관련한 글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새들백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이 곳에서 Small group host를 맡고 있습니다.

 

해마다 많은 목회자와 성도님들이 한국에서 새들백교회에 탐방을 오십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번 책을 구입하기 위해 가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에서 오신 목사님 같은 분이 목적이 이끄는 삶에 관련한 책을 약 $60 어치 사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행자 수표를 내시길래 방문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목적이 이끄는 삶이나 새들백교회 이야기를 보고, 새들백교회를 보기 위해서 방문을 하십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히 그 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방문으로 새들백교회를 알려고 한다면, 새들백교회에 대해서 1% 정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1~2번 방문만으로 새들백교회의 전부를 알았다고 말한다면, 차라리 방문하지 않은 분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차차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새들백교회가 알려지게 된 데에는 님이 언급하신 새들백교회 이야기(Purpose Driven Church)를 통해서 입니다. 새들백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릭워렌 목사님이 자신의 15년 목회를 되집어 보며, 그리고 새로운 비전을 바라보며 쓰신 책이 바로 이 것입니다. 이 책은 베스트 셀러를 기록하며, 미국의 많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읽혀졌고, 타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혀진 책입니다. 새들백교회에서는 'PURPOSE'라는 단어가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단지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의 로버트 슐러 목사의 긍적적 사고 방식에 의한 목표를 정함으로서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는 일종의 목표(goal)가 아닙니다. 목적인 목적인데, 누구의 목적인가? 책의 저자인 릭워렌 목사의 목적도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목적에 의하여 이끌리는 교회를 말하고자 함이 저자의 의도입니다. 릭워렌 목사는 그저 목회의 방향성을 설정하여, 그 것을 위해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누구나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님들은 자신의 목회철학이 있고, 그 것을 기준으로 하여 방향성을 설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후에 나온 목적이 이끄는 삶(Purpose Driven Life)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목적으로 이끌리는 삶을 소개한 책입니다. 이 책은 성경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우릴 향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을 통해서 새들백교회는 크게 부흥되었으며, 미국을 비롯 많은 교회들이 이 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운동(movement)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인도없이는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아직도 뉴욕 타임즈의 베스트 셀러로 올라와 있고, 이 책을 통해서 얼마전에는 살인자가 자수를 하는 등 사회적으로 큰 이슈 가운데 중요한 열쇠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얼마전에는 새들백교회에서 새로운 캠패인 P.E.A.C.E.를 시작했습니다. 이 캠패인은 하나님께서 우릴 향한 5번째 목적인 선교에 대해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3년 동안 이 캠패인을 위해서 많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준비를 했고, 남가주의 많은 언론들은 새들백교회의 이번 캠패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님은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했습니까?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그냥 지켜보고 계시지 않았는지요? 학생이신지 직장인이신지 알 수는 없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공부를 하고, 일을 하면서 그들을 향한 애통해는 맘을 가져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를 섬기려고 오셨다고 하셨는데, 그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겨본 적이 있으신지요? 하나님께서는 잃은 양 한 마리가 찾아오면 천국에서 잔치를 베푸신다고 하셨는데... 우리의 삶은 큰아들처럼 시기하며, 질투하고는 있지 않은지 반문해 봅니다.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 아십니까? 제가 새들백교회를 예로 들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얼마나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십니까? 새들백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뜨겁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예배의 모습을 탈피해서 드리는 현대식 예배이지만, 그 예배를 집중해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일주일을 살면서 그들의 삶을 예배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저는 그렇게 노력하는 신앙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섬김이 있는 교회입니다. 얼마나 섬기십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새들백교회의 많은 교인들의 생각 속에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섬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섬김의 모습에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저는 초창기 recycle ministry에서 섬겼는데, 쓰레기통을 뒤지며 재활용 가능한 것들을 모아 팔아서 성경을 구입하여 성경이 필요한 곳에 보내는 일을 하는 팀이었습니다. 누가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누구나 다 싫어하는 쓰레기통 뒤지는 일을 이 분들은 기쁨으로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최선을 다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선교 지향적인 교회입니다. 근처에 수정교회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멋진 교회 빌딩과 캠퍼스를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들여다 보면 중심된 것이 없습니다. 새들백교회는 교회의 빌딩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의 직장동료와 이웃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서 그들의 가장 좋은 것으로 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하나님이 기쁨이 되기 위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새들백교회의 성장은 단순히 수평이동에 의한 성장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을 인도함으로 통해서 일어나는 성장입니다. 저는 이 분들을 통해서 참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지상명령을 순종하기 위해 그들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릭워렌 목사님이 단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명성을 위해 그러한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Purpose Driven Life)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팔린 책입니다. 그런데, 저자의 수익금은 어떻게 사용되어졌는지 아십니까? 그는 그의 수익금을 교회에 다 내 놓았습니다. 그는 그 책을 통한 수익금을 가지고, 차를, 집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양말 한짝도 사지바꾸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새들백교회가 그 증인입니다. 그런데, 하물려 릭워렌 목사님이 천박한 경영논리로 교회를 경영하고 있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 것은 정확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달란트 비유를 아십니까? 5달란트와 3달란트를 가진 이들은 충성된 종이라는 말을 주님께 들었습니다. 그러나 1달란트 가진 이는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는 최악의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무엇을 남겼는지도 중요하지만, 저는 이 부분에서 어떻게 사용되어 졌다는 것을 함께 보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가진 달란트를 그저 비판하고, 아무런 영양가 없는 것에 소비하였다면, 이 역시 게으르고 악한 종이 될 것입니다.

 

 

참자유 근데 수정교회는 또 뭔 교회입니까? ㅎㅎ 2005/10/07 21:45
양손잡이 수정교회는, 엘에이에 있는 '수정'으로 벽을 만든 교회로, 새들백과 쌍벽을 이루는, (좀 더 천박한) 미국자본주의 기독교의 전형을 보여주는 교회죠.. 그나저나, 요즈음 공사가 다망한 관계로 신변잡기 글을 쓸 여유도 없는데, '글 쓰기의 유혹'을 자극하는 글이군요...ㅎㅎㅎ 2005/10/08 04:09
gyedo 착하고 순진하기만한 그리스도인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2005/10/08 05:15
참자유 저 또한 이런 글에 대꾸할 여유가 없는지라... ^^
그들은 그들대로의 기독교를 만들고 가꾸라고 하는 것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수정교회나 새들백교회나 그들만의 기독교 안에서 그나마 호적수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쨌거나 이런 기독교인들은 어쩌면 저렇게 한결같이 세상에서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오만에 빠져 있는지 모르겠어요. ^^; 비판적인 것과 버릇같은 불만불평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하고는 대화가 안되죠. 어쨌거나 이 분 눈에 나는 전혀 예배가 뭔지도 모르고, 전도 한 번 안해본... 어쨌거나 불만불평의 죄인에 불과하다는거죠? ㅎㅎ
2005/10/08 18:24
꿍짝 비판 = 불만 이라는 공식은 대한민국식 해석이 아니였던가요? 비판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해서 그런걸지도... 2006/05/03 16:21

 

 

 

 

 

http://blog.naver.com/qlibrary/40018330879

안녕하세요?

블로그에 올리신 글은 잘 보았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블로그를 갔더니 역시나더군요.

(역시나 제 메일에 대한 평가를 했다는 말입니다.)

 

 

"요즘 본의 아니게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과 논증(argument)과 논리(logic)을 공부하고 있는데요. 이 글은 그 공부에 있어서 부적절한 논증과 논리, 과도하면서도 억측에 가까운 상대방에 대한 가정(assumption) 등 - 이런 것들을 보통 오류(fallacy)라고 부르지요 - 이 모두 한 데 모여 있는 전형의 글인 것 같아서 공부도 된다 싶어 굵게 표시해 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의 나쁜 태도도 종합선물세트로 한 군데 다 모여 있습니다. ^^"

 

 

제 글을 거의 오류라고 부르며, 기독교의 나쁜태도의 종합선물세트라는 평가와 함께...

비웃음같은 ^^까지도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그런 글을 읽으면서, 제가 화가 나야 할텐데 님이 참 불쌍하게 여겨지는 마음은 어찌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님의 비판의 글을 한번 더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님은 님이 좋아하지 않는

기독교를 보면서 말씀 중심에 서 있지 않다고 하는데, 과연 님의 비판은 어떠한 성경의 근거에서 있는지 고개가 까우뚱 거려질 뿐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첫 설교(산상수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어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돌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 앞에 더지지 말라. 저희가 그 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6절.

 

위 말씀을 성경사이트에서 카피해서 붙일 수도 있지만, 제가 손으로 직접 쳤습니다.

그 것은 이 말씀을 형제님과 정말...진심으로 같이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말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형제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며...

 

형제님이 믿으시는 기독교가 저의 기독교와 다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형제님께서 저의 글에 대한 평가를 하시고, 그렇게 글을 올리 실 때...틀림없이 형제님도

제가 같은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생각 하셨을 줄 압니다. 저는 형제님을 보지 못했지만,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같이 이야기 해 보고자 하여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형제님은 그런 글을 보낸 저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이런 비판의 결론을 내리신 것입니까?

 

저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신학을 배우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평신도에 불과하지만,

기독교라는 것은 교회의 문제를 나누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정말 그러한 것들을 나누고 싶으면 정치를 하셔야 겠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주신 이웃들을 자신의 몸 같이 사랑하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사회의 부패를 가슴아파 하며 하나님께 중도해 드리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요? (다른 여러 모습도 있겠지요?)

 

제가 말씀드리는 이런 모습을 천박한 기독교?라고 또 다시 판단하실 수 있겠지마는,

그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맘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일의 결국은 주님이 아실테지요. 그 분만이 판단하실 줄 믿습니다.

 

세상과 조금 더 구별되며, 이 세상을 위해 중보하며 요나와 같은 삶을 살길 원하는

한 나그네가 드립니다.

 

 

http://blog.naver.com/qlibrary/40018339001

 

 

이렇게 재차 메일을 보내주시니, 귀하를 상대로 답변을 몇마디 드리는 것이 도리다 싶습니다. 즉시 올렸던 다소 긴 답변글을 몇 시간 포스트해뒀었습니다만, 그 글은 내리고 간단하게 대답하려고 다시 쓰는 글입니다.

 

 

1. 먼저, 귀하께서 최초 저에게 보내주셨던 그 글에는 오류가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오류라 함은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하는 자의 말이 도무지 설득력을 확보할 수 없도록 구성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말하는 자 스스로는 상당히 진지함이 서려있다고 판단되나, 듣는 상대방에게는 그 말의 논리가 앞뒤도 안맞고, 적절하지도 않을 때가 바로 그런 오류가 끼어 있는 경우입니다. 귀하의 오류는, 일차적으로 제 블로그에 대한 독해가 되지 않았다는 것에 비롯된 것 같습니다. 귀하는 제 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비판"이라고 하는 전혀 시의적절하지 않은 화두를 내세워 저를 설득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용하시는 개념들의 정의도 불명확합니다. "비판"과 "불만불평"을 착각하고 있으며, "기독교"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서도 '천박하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시각의 편협함을 보이셨습니다. 부적절한 가정과 부적절한 분류법을 바탕으로 해서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드시니, 그 설득력에 힘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블로그에 올려놓은 귀하의 글에서 굵은 표시한 것들은 이런 일련의 오류들이 의심되는 부분들입니다. 그 글에 연결되어 있는 "논리학의 오류"라는 글을 훑어보시고 자신의 오류가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2. 귀하의 기독교는 분명 제 기독교와 다릅니다.

 

귀하는 이해가 잘 안되시겠지만, 저 또한 예수를 유일한 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귀하가 의심하신대로 분명 귀하의 기독교는 저의 기독교와 다릅니다.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바의 기독교에서는 귀하의 기독교가 몹시도 편협하고 왜곡되어 있어서 천박하게 보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피차간에 큰 의견차가 있으나, 간극을 좁히는 노력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귀하 한 사람을 붙들고 그런 초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 시간이 요즘 없습니다. 그 점은 용서하십시오. 저 같은 기독교인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네이버에서 찾아보시면 생각보다 많습니다. 궁금하시면, 찾아보시고 그 분들에게도 좀 배우십시오. 도대체 왜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는가를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보시면, 이해가 될 수도 있을터인데... 알아서 하실 일입니다.

 

참, 함부로 저를 형제라고 부르지는 마십시오. 식상합니다. 귀하의 글 맥락상, 형제라도 부르신 부분도 매우 거북합니다. 솔직히 저는 귀하를 형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현재는 그렇습니다. 저는 함부로 아무나 사랑하는 그런 기독교인은 못됩니다. 저는 비난이 마땅한 사람에게는 비난을 보내는 것이 더 중요한 기독교인입니다. 누구나 다 사랑하는 것이 매우 고상한 것 같지만, 그 진의가 약간만 왜곡되면 가장 천박한 것이니까요.

 

 

3. 더 이상 메일을 보내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죄송하게도, 제가 요즘 중요하고도 분주한 개인사가 있어 귀하께서 도전하시는 것들에 관해서 응대할 여유가 없습니다. 두 차례 보내신 메일을 통해서 충분히 귀하의 견해와 포지션은 파악했습니다. 귀하께서도 저에 관해서 그러실 것으로 판단됩니다. 저 또한 신학생은 아닙니다만, 신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천박한 신학관을 변명하지는 않습니다. 제 블로그에는 그런 천박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제 노력이 이따금 올려질 뿐입니다. 언제든지 찾아와서 읽으셔도, 지금까지 이해가 안되신 것처럼 계속 이해가 안되실 것입니다. 혹시라도 서너 달 뒤에 제가 여유가 되면, 그때 더욱 더 매몰차게 귀하의 견해가 어떻게 건전하지 못하고 천박한지를 조목조목 알려드리겠습니다만... 지금은 제게 때가 아닙니다. 블로그에 찾아오셔서 글을 읽으시는 것은 귀하의 자유입니다만, 지금까지 보내신 메일들과 입장에서 큰 차이가 없으시다면 한 몇 달 참으셨다가 도전해주십시오. 그때도 여전히 새들백교회는 제가 아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천박한 교회인 것은 여전할테니까요.

 

 

 

 

http://blog.naver.com/qlibrary/40020505911

 

 

새들백교회 이야기에 관해 썼던 글(이 글에 트랙백 걸려있는) 퍼가는 분들이 간간이 있어서, 그냥 다시 한 번 새들백교회와 릭 워렌에 대한 이야기를 몇 자 적어 봅니다.

 

새들백교회의 성장보고서 - 새들백교회 이야기 - , 릭워렌이 말하는 모호하기 그지 없는 자기계발서? - 목적이 이끄는 삶 - 의 광풍狂風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매우 절망적이다 싶습니다.

 

그가 말하는 목적(purpose)은 공허하기 그지 없는 메타포에 불과합니다. 교회성장에 관한 그의 책은 교회 성장의 동력을 밝히고 있다기 보다는, 자기 자랑에 불과한 책입니다. 그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교회 성장의 핵심적인 동인이기보다는 양적으로 성장을 이룬 교회에 대한 막연한 시샘에 불과합니다. 어느 교회건 그 교회 안에서 교회 성장에 목을 매는 사람은 그 교회의 목회자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시샘을 얻은 목회자들은 모호하기 그지 없는 새들백교회 베끼기를 시도했던 것입니다. 새들백교회에서 했다는 일들을 재현해봐야 교회가 성장될리가 만무합니다. 릭워렌이 제시하는 자기 교회 성장의 원인은 전혀 그 교회 성장 요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설령 그가 기술하고 있는 테크닉들이 거기서는 먹혔다고 하더라도 태평양 건너편의 전혀 다른 문화권인 한국에서 그 테크닉이 먹힐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새들백교회의 성장은 그저 우연한 트랜드에 불과한 것이며, 교회 성장의 핵심과 관련이 있는 사건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회/문화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회를 세운 사람조차도 교회 성장의 중요한 동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새들백교회 성장의 실상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릭워렌의 "새들백교회 이야기"라는 책은 우석 2005년도 논문과 매우 흡사합니다. 다른 교회에서 시도해봐야 재현이 불가능한 것이며, 그 책에서 설명하는 교회 성장 비결은 적시되지 않은 그 무엇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며, 또한 결국 새들백교회의 성장은 새들백만 재현할 수 있는 원천기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썼던 새들백교회 이야기에 관한 글은 교회의 양적 성장이 중요하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들백교회를 통해서 양적 성장의 비결을 찾아낼 수 없다는 점 또한 지적하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의 원론적인 측면에 비추어 볼 때, 새들백교회의 비결로서의 "목적으로 하기(purpose driving)"은 지들끼리나 떠들고 있으면 될만한 전혀 공허한 비결이라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실제로 교회를 성장하게 하는 "목적"은 없는 것이지요. 양적 성장은 분명한 목적이 될 수 있으나, 그것이 어떻게 교회를 움직이는지(diriving)는 며느리도 모를 일이니까요. 그래서 목적이라는 릭워렌의 개념은 개념이라기보다는 메타포에 불과한 것이며, 하나 마나한 소리인 셈입니다. 해보니 전혀 효과가 없더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새들백교회이야기"라는 책을 서점 베스트셀러 서가에서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교회를 휩쓸고 지나간 광풍들은 다시 재차 불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교회 성장뿐 아니라 개인의 삶 만들기조차도 설명하려고 드는 릭 워렌의 시도는 유효할까요? 내 입장은 매우 회의적입니다. 물론, 인간은 저마다 다르니 그 책을 읽고 나서 삶이 목적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끌려진다고 하는 사람들까지 조목조목 반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달리 반박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교회 성장에 관해서는 여러 사람이 함께 그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 효력이 있고 없고는 암묵적으로라도 확인됩니다. 그러나 개인사에 관해서는 그럴 수 없는 일이지요. 어떤 사람이 매일 자기 오줌을 받아서 마시고 난 뒤로는 이전과는 다르게 건강해졌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건강 호전의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믿는 그 사람에게는 오줌이 특효약이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 기독교 신앙서적들 중에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는 영역인 영성계발서나 영성계발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자기계발서들은 세속적인 자기계발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인용하는 책이 주로 성경이라는 것과 사용하는 개념들이 기독교 문화권에서 편리하게 생각하는 것들이라는 점이지요. 그런 책들이 실제로 개인을 계발시키는 동인으로 제시하는 것들은 그 이름표만 기독교 문화에서 찾은 것으로 내건 것말고는 세속적 자기계발서에서 이미 이야기된 것들을 사용하는 경우이거나, 혹은 실제로는 전혀 자기계발의 직접적인 동인이 되지 못하는 모호한 메타포들의 나열이지요. 듣기에는 자기계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들리지만, 실상은 계발하고자 하는 개인의 태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을 궤변으로 연결시켜 놓은 경우입니다. 이런 책들을 읽는 것은 대체로 공허합니다.

 

공허한 이유는 먼저 이렇습니다. 자기계발서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책들이 말하는 생활태도의 혁신이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인생 역전될 것이 분명합니다만, 대체로 그렇게 살아내는 사람은 백만명의 하나일뿐입니다. 원래 혁신이라고 하는 것은 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기때문에 혁신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그런 혁신을 지속적으로 따라서 해낸다는 것은 "회심"만큼이나 힘든 일이지요. 계발서가 효력있는 자기계발의 동인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에게 있어서 공허한 이유는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계발이 한 번의 독서로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저 읽어봐서 안다는 위로가 자기계발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나 싶습니다.

 

다음으로는 실제로 자기계발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것들이 제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책들은 한 마디로 입에 발린 그럴싸한 소리들만 나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읽으면서도 신이 안나고, 다 읽고 나면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말이 터져 나옵니다. 한 마디로 쓰레기 같은 책이지요. 사이비 자기계발서입니다. 자기계발서 시장이 돈이 되니, 일단 화끈한 제목 달고 내놓고 보는 책입니다. 이런 책을 집어 드는 사람들이 대체로 얄팍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얄팍한 지갑을 얄팍하게 열어보려는 수작인 것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공허한 메타포가 삶을 이끌게 하기 때문에 당연히 공허합니다. 이런 책의 효용은 그 책을 파는 사람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가 그렇게 버는 돈으로 어떤 거룩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읽어서 시간낭비하는 책을 팔았다라고 하는 점에 관해서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아직도 새들백교회에 뭔가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할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이전의 제 글을 퍼가시는 분들도, "새들백교회"라는 그저 잠시 시끄러웠던 사건을 들춰보는 정도로 퍼가셨으리라 봅니다. 혹시라도 제가 이전에 썼던 글이 새들백교회에 대해 긍정적인 어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실까 싶어서 다시 한 번 지적해보려고 글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