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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신> 이재철 목사,
후러싱제일교회
부흥회 인도 이재철 목사
1949년 부산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불문과를
나왔다. 회'를 개척했으며, 개척 초기의 약속대로 10년 임기가 끝나자 사 임했다. 역했으며, 임기가 끝나고 돌아와 개인 복음전도자로 집필에 전념 하는 한편 서울의 한 작은 교회 중고등부 교사로 섬겼다. 받아 '100주년기념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할 예정
△지난 몇년간 미주에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이곳 기독교인들의 변화나 달라진
추세를 봅니까? △말씀하신 대로 교회들은 예배당을 짓고, 더 크게 개조하고, 또 교육관을
짓고, 건축만 하는 느낌을 줍니다. 주님의교회는 건축헌금을 따로 하지 않고도 정신여고 강당을 지어준 아름다운 선례로 지금까지 회자되는데, 어떤
방법으로 시행됐는지요?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러면 참다운 예배의 회복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될 경우 결과적으로 세상의 불의나 부조리를 묵인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만일 기독교사회책임 등과 같은 단체에서 목사님을 영입하려 한다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목사님은 인생의 많은 과정을 거치시고 목사가 되셨습니다. 목회자가 됐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또한 목회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러면 목회의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입니까.
-인생을 살면서 가장 의미로웠던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시죠.
△목회자로 살 정도의 수준이나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주님이 나를 도구로 쓰신다는 사실에 감격합니다. 날마다 의미롭게 지냅니다.
-새해를 맞아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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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재철목사, 변화가 일어나는 복음을 전하다.
한국의 크리스천 및 신학생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목회자 이재철목사(100주년 기념교회)가 후러싱제일교회(김중언목사)의 30주년 기념부흥회를 10월 13일(목)부터 16일(주일)까지 인도하고 있다. 이재철목사는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요 21:1-25)"라는 제목으로 4일 동안 강해식으로 진행한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은 매우 중요하다. 4복음서의 마지막 장이다. 그곳에 결론이 다 들어가 있다. 그다음에 교회역사를 밝혀주는 사도행전이 시작된다. 따라서 21장은 바로 복음과 교회를 연결시켜주는 연결고리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땅끝에 관심을 두고 부담감으로 살아간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이 부활후 제자들을 땅끝으로 보내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라 하셨다. 그들은 갈릴리 사람이었고 그곳은 가족이 있는 곳이었다. 갈릴리는 그들의 삶의 현장이요 터전이었다. 그러면 주님이 왜 그들을 땅끝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보냈는가?
만약 자기 삶의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면 땅끝증인이 될수 없다. 내삶의 현장에서 역활하는 체 살아가는 연기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삶의 제사를 원하신다. 삶의 현장에서 먼저 증인이 되어야 한다. 갈릴리는 히브리어로 "고리"라는 의미가 있다. 땅끝은 아프리카나 지구 반대쪽 나라가 아니다. 같은 방향으로 계속가면 지금 서있는 이곳이 땅끝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할수 있어야 한다.
(2005. 10. 13.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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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신> 이재철목사, 지하무덤에서 시작한 초대교회의 정신을 본받자.
(2005. 10. 14. 아멘넷)
USA아멘넷 http://usaamen.net 100주년기념교회 http://100churc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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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신>
이재철목사, "두팔을 들고 전폭적으로 주님이 인도하심을 받으라!"
후러싱제일교회(김중언목사) 부흥회 세번째 날(15일/토)을 맞이하여 이재철목사(100주년 기념교회)는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날 이재철목사는 영락교회 전도사가 된 경위, 처음 교회를 개척한 이야기, 스위스교회로 떠난 이유, 극장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이야기, 100주년 기념교회를 담임하게 된 하나님의 역사들을 간증식으로 전해 주목을 끌었다.
목회란 사랑과 함께 교우들과 더불어 사는 것
주님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떡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생명이었다. 그랴서 터질것 같은 감동이 있는 것이다. 진수성찬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른 떡 한조각으로도 상대를 감동시킬 수가 있다. 그것은 음식 만드는 사람의 사랑이다. 사랑이 통할때 마른 떡 한조각으로도 사람이 행복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1988년 주님의 교회를 시작했을때 목회자로서 인턴과정을 밟지 못했다. 영락교회 전도사를 하다가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교회에 상처받으신 분들이 교회를 시작하자고 부탁을 했는데 응답하지 못하다가 계속하여 그분들이 교회를 정하지 못하자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목회란 교인들을 열심히 성경공부시키고 설교만 잘하면 되는줄 알았다. 그런데 교회에 회의가 많은 것에 놀랐다. 또한 의견들도 다 달랐다. 그래서 개척한지 10개월이 지난후 이것은 아니다 싶어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목회란 그렇게 교우들과 더불어 사는 것 이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이 목회의 중요한 본질임을 알았다.
89년 4월 예배처소인 YMCA 의 앞자리에 앉아 그만두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기척이 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교인이 "전도사님, 이것 가지고 가세요"라고 보자기를 주었다. 그것을 잡으니 따뜻했다. 그것은 검은 팟으로 "축! 생신"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시루떡이었다. 새벽 5시에 떡을 따뜻하게 만들어 올려면 그분은 밤을 새운 것이다. 동역자들과 떡을 나누어 먹으며 떡맛을 모르고 울며 먹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이런 교우들과 함께 라면 목회를 계속해야한다는 결심을 했다. 떡이 내 목회관을 바꾸어 준것이다. 사랑은 그래서 중요하다.
사랑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실수를 했다고 짜르고 쫓아 내는 것은 기업의 논리이다. 사랑은 기회를 다시 주는 것이다. 그것을 받고 안 받고는 상대의 문제이다. 사랑은 높은 곳에 서서 그곳으로 상대를 올라 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 상대의 수준으로 쳐다 보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수준으로 오셔서 우리를 품고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 가셨다. 욕망의 바다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사람을 도구로 이용한다. 욕망의 바다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이다.
나와 다른 것으로 내가 없는 것을 보완하는 조화와 일치를 알라
우리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동등하게 보지 않고 내려다 보는 마음이 더 크다. 하지만 그도 주님 앞에서는 소중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은 주님앞에서 동등한 것이다. 그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 주어야 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기가 가장 힘들다. 라이벌은 어원이 리버(강)에서 왔다. 같은 강물을 먹는 사람은 경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른 교회보다는 같은 교회 교인끼리 경쟁상대가 되기 쉽다.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품어야 한다. 한국사람들은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면 모함하고 끌어내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보다 높은 것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마굿간 구유를 침대로 삼으셨다. 요즘은 아무리 가난해도 밥통을 침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주님은 가장 바닥에서 시작해서 어려운 사람을 이해 하신다. 또 하나님은 천하 제왕보다도 높으신 분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고독과 사장의 외로움도 이해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주님 주위에는 가난한 사람부터 부유한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만약 특정 부류만 모이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백인 흑인등 특정 인종만 모이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남녀노소 빈부를 떠나 한자리에 같이 모일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을 본 받아 모든 사람을 수용할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한 사진작가는 스냅사진외 풍경과 사물사진을 찍을때 함부로 찍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소나무를 찍는다고 하면 아침과 저녁, 비올때와 맑을때 그곳을 방문하여 소나무의 마음을 먼저 느낀다고 한다. 소나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들을때 비로서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은 사진은 의미가 없다. 왜 나와 코드가 맞지 않은 사람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의문이 들수도 있다. 하지만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배척하지 않고 공감과 이해를 하고 상대의 입장에 서는 것이 필요하다. 조화를 이룰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은 일방적인 사랑보다는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서로 이해하는 것이 서로를 사랑하는 출발점이다.
나는 결혼한지 20년이 되었다. 아내가 문단속을 못해 문은 꼭 내가 잠근다. 처음에는 아내가 참 한심했으며 짜증났다. 아내는 군인의 집안에서 자라나서 도둑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나는 3번이나 도둑맞은 경험이 있고 도둑을 따라가다가 큰일날뻔 한적도 있었다. 외국에 가는 때면 아이들에게 문단속을 부탁한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내게 없는 하나님에게 대한 신실한 믿음이 있어 방황하는 내가 바로 설수 있게 해 주었다. 서로 모자라니 그래서 부부되게 하심이 아닌가? 나와 다른 점이 있어 배척할것이 아니라 내가 없는 것을 보완하는 조화와 일치를 알때 만인을 위한 보편한 교회가 될수 있을 것이다.
두팔을 들고 전폭적으로 주님이 인도하심을 받으라
믿음은 주님에게 두 팔을 벌려 항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이끌림을 받는 것이다. 신앙연륜이 깊을수록 내가 원하는 대로 주님을 끌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해 두팔을 벌리고 전폭적으로 주님에 의지할때 주님의 계획이 펼쳐지게 된다. 지나간 인생을 돌이켜 보아라. 여러분이 한일이 더 많은가? 아니면 되어진 일이 더 많은가? 우리는 무엇을 할려고 하지만 대부분 무산이 된다.
아내는 신실한 크리스챤 이었지만 믿음이 없는 나는 오직 선데이 크리스챤이었다. 목사가 될려고 신학교에 간것이 아니었다. 하도 방황해서 삶의 공간을 바꾸지 않으면 살수가 없어 나를 주님에게 묶을려고 신학교에 갔다. 당시 외국인 회사에 다녔는데 본사가 쌍룡빌딩에 있었다. 빌딩의 창문을 통해서 당시 한국의 최고교회였던 영락교회가 보였다. 어머니의 신앙의 씨앗으로 목회자가 되면 저런 교회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신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영락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교육전도사를 뽑으니 이력서를 제출하라는 것이다. 인선위원들은 전에 있던 젊은 전도사가 일을 벌려 이번에는 가장 나이가 든 사람을 전도사로 뽑았다. 나는 37살에 신학교에 들어갔다.
나는 교회의 담임목사의 자격이 없다. 흠없는 사람이 교회를 세워야 하므로, 더우기 개척교회 목사로서의 자격은 더욱 없다.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가 성장할때 까지 내가 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 주님에 의해 되어진 것이다. 10년 후 교회를 떠난 것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소문나니 목회자들이 가고 싶어하는 많은 교회에서 청빙이 왔다. 하지만 내가 갈 필요가 없었다. 그때 스위스에서 연락이 왔다. 20년된 교회인데 어려우니 가족을 두고 혼자와서 3년을 봉사하라는 황당한 제안을 받았다. 나중에 이야기를 듣기에는 스위스가 아름다워 목회자들이 갈려고 했지만 스위스의 물가가 비싸고 내부형편도 좋지 않아 포기 했다는 것이다. 그곳으로 가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남이 가기 원하면 내가 갈 필요가 없지만, 갈 사람이 없으면 내가 가야 한다는 생각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곳에 갔다. 스위스는 유럽의 중간에 있어 그곳에 있는 3년동안 평생배워도 다 배우지 못할 정도로 2000년 기독교역사와 현실을 읽고 배워 귀국했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작년에 서울극장을 운영하는 자형이 극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 원하니 나보고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가장 큰 900석의 극장을 사용하면 2번 극장상영을 못하게 되고, 1회 2000만원의 손해가 난다는 계산이었다. 일주일에 한번은 무리가 있어 한달에 한번씩 모임을 가진다. 음악인와 먼저 공연을 하고 내가 설교를 한다. 술취한 사람등 누구나 올수가 있다. 목사들 가운데 그런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당시 이재철목사가 얼마내고 그것을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하지만 이것을 내가 요청한다고 되는 일인가. 되어진 일이고 하나님이 역사 하신 것이다.
양화진은 개신교 최고의 성지이다. 20년전 한국 기독교의 원로들이 쓰레기장을 성역화해서 선교기념관을 세웠다. 외국인들이 출석하는 유니온교회가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기념관의 주인처럼 행동했다. 주님의 교회를 하다가 더 넓은 에배처소가 필요해 주일날 예배당을 사용하자고 유니온교회에 편지를 보냈으나 한국인은 안된다고 거절 당했다. 20년을 그곳에 산책하면서 한국인이 지은 저 건물에서 한국인이 예배를 드릴수 없음을 가슴 아파 했다. 금년 4월 기독교 100주년 기념위원회에서 100주년 기념교회 담임목사를 요청해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런데 교회가 있는 곳이 바로 선교기념관 이었다. 양화진이 다시 한국인의 성지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것도 내가 의지해서 된것이 아니다.
두팔을 들고 하나님에 의지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나는 구체적인 미래의 계획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할것이냐고 묻지만 나의 대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나는 끌려 갈뿐이다. 그렇게 끌려 갈때 아무도 상상할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진다.
주님을 올바르게 따르지 않으면 헛소문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요한복음 마지막 구절에 제자가 거짓말하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가 나타나는 사도행전이 시작된다. 이것은 중요한 메세지가 있다. 교회가 거짓과 헛소문의 진원지가 될수 있다는 말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건물과 제도가 아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을수 있는 곳이다. 대기업도 부서사람 중심으로 몇 십명과 인간관계를 맺지만, 교회는 수백명과 관계를 한다. 교회는 주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진리에 이탈하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거짓의 진원지가 된다. 교회생활을 오래 할수록 거짓 소문에 가슴앓이 한 분이 많다. 나도 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지만 99%가 거짓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거짓소문을 퍼트렸는데 교인들도 쉽게 피해자나 가해자가 될수 있다.
욕망의 바다에 빠진 우리를 주님은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다. 하지만 소를 물가로 끌고 가는 것은 쉽지만 물을 먹이는 것은 쉽지 않다.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다. 주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내가 주님안에서 만나고 밤낮 주님과 동거하고 주님의 사고로 사는 것을 말한다. 제자들이 거짓소문을 낸것은 빛의 자리로 인도함을 받았지만 그곳에 주님이 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 인도되어도 주님안에서 살지 않을수가 있다.
71년 대학을 졸업했지만 70년 11월부터 외국인회사에 다녔다. 프랑스대사와 친분이 있어 대사관에 와서 근무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국비로 유학도 보내주는 좋은 조건이었다. 결정하기가 힘들어 언론기관에 있는 4째 자형에 개인문제로 의논할 것이 있다고 연락하고 집에 찾아 갔다. 누나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골려 주려는 생각으로 당시 내가 신춘 문예작품으로 썼던 소설(대학생과 레지의 사랑)의 내용을 장난삼아 말하고 술에 골아 떨어졌다. 사태는 돌이킬수 없는 상태가 되고 집안은 난리가 났다. 다음날 누나 5명과 어머니가 계신 자리에서 해명을 하는데 사실을 다 말했지만 누나들은 나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말을 믿어라. 저렇게 말할때는 진심이다"라고 말하자 문제는 끝났다. 어머니는 나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내 진심을 알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예수그리스도와 동거하고 주님과 함께 살아 간다면, 말을 옮기고 상처를 주는 주인공이 될수는 없다. 주님을 올바르게 따르지 않으면 헛소문의 상처를 받을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사랑의 교회가 될수 있다.
믿음이란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을 간섭하지 않는 것
믿음이란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을 간섭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86년 영락교회의 전도사부터 많은 행사를 주관했지만 한번도 날씨를 위해 기도한 적이 없다. 그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 내가 기도해도 하나님의 섭리가 비가 오는 것이라면 비가 온다. 어떠한 날씨라도 주님의 일이 잘 이루어 지도록 기도할 뿐이다. 부모들은 자식의 배우자를 생각하며 외모/학력/직업/나이를 주님에게 통고한다. 주님은 그것에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다. 기간이 지나보면 내적이 아니라 외적 중심의 조건을 더 고려한 사람들은 행복을 구하기 힘들다. 주님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절대로 완성된 보석을 주시지 않는다. 원석을 주셔서 셋팅하도록 하신다. 그 가운데 행복을 느낄수 있다. 우리는 그 원석을 볼수 있는 혜안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내가 아는 한 집사는 한국의 소문난 기독교 가문의 며느리이다. 남편과 결혼할때 그는 불신자 였다. 아들이 그 집사를 부모에게 소개를 시키자, 시부모들은 처음에 충격을 받고 실망했지만 마음을 추스리고 며느리에게 "아들이 믿지 않은 너를 선택한 것이 뜻 밖이고 실망스럽지만 아들이 믿음으로 너를 선택했고 네가 기도의 응답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가족과 더불어 좋은 신앙인이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하며 결혼을 승낙했다. 그 이후 집사는 주일에도 집에서 쉬며 교회에 가지 않았지만 시부모들은 한번도 교회가자고 권유하지 않고 친딸처럼 대해 주었다. 집사가 미안해져서 효도차원으로 동네 예배당의 특별새벽기도회에 자발적으로 나갔다. 예배당에 발을 들여 놓으니 "애야, 왜 이제야 왔느냐?"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후 그 집사는 참된 신앙인이 되었다. 시부모들은 믿음의 응답으로 며느리가 왔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그 부분은 자기들이 관여해야 할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역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다.
(2005. 10. 15. 아멘넷)

<제5신>
이재철목사,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는 삶의
현장"
후러싱제일교회(김중언목사) 부흥회 마지막
날(16일/주일)을 맞이하여 이재철목사(100주년 기념교회)는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재철목사는 4일동안의
시리즈 설교의 결론으로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는 삶의 현장"이라며 "예배당 안과 밖의 삶이 일치 안하면 교회가 세상에 뎦여져도 어떻게 교회가
세상을 새롭게 할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아래는 마지막 날 설교요약이다.
어떻게 요한만 주님과 있었던 더 많은 것을
기억해 냈을까?
요한사도는 요한복음에 자신이 기록한 일 외에도 예수님이 하신 일이 많아
다 기록할수 없다고 말했다. 과장법같이 들리지만 하나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다. 자난 2천년동안 부활한 그리스도가 인류의 역사속에
2천년간 이지구상에서 믿은 사람의 삶에서 역사하신 모든 일을 적으면 도대체 얼마나 될까? 요한복음에 기록된 내용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같은 관점으로 기록해 공관복음이러고
부른다. 그에 반해 요한복음 서는 4복음서로 불러지고 공관복음서와 내용이 전혀 다르다. 많은 내용들이 공관복음서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있다.
예를 들면 갈릴리의 욕망의 바다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과거형으로 잊어버렸을때 예수님은 현재형으로 그들 곁에 서 있았다는 내용과 제자들이 뭍에
도착하여 그들은 주님을 배신햇어도 주님은 그들을 위해 생선과 떡을 준비했다는 내용들은 요한복음에만 있다.
우리가 잘 알듯이 4복음서는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다. 마태와 마가가
상상으로 적은 것이 아니다. 주님과 함게 3년간 살았던 제자들이 주님과 같이 경험하고 느끼고 본 것을 기록한것이다. 마태와 요한은
같이 3년간 주님과 현장있었으나, 요한이 기억한 것을 마태는 기억하지 못했다. 공관복음은 에수님 승천후 2-30년후에 기록한 것이고,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부활 후 60년후에 기록한 것이다. 다른 제자들이 기록하지 못한 내용을 어떻게 요한이 더 오랜 기간후에 기록할수
있었나?
요한이 삶의 현장을 통해 현재형의 예수님을
만나다
주님은 십자가에 목박혀 돌아가실때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는
유언의 말씀을 하셨다. 요한은 말귀를 알아듣고 그날로 부터 예수의 육신인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승천한 후 에베소에서
살다 죽었다. 에베소에 가면 마리아가 예수님 승천 뒤 최소한 30년 이상을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만약 요한이 20대 중반부터 마리아를
봉양했다면 50-60대까지 평생을 할머니 봉양을 위해 바친 셈이 된다. 당시 자신과 함께 주님 아래있던 동창생은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뭍사람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동창생은 승승장구하고, 20대 중반부터 요한이 초로의 노인이 되기 까지
할머니 봉양에 전인생 쏯았으니 얼마나 따분하고, 얼마나 피하고 싶었을까? 얼마나 하고 싶은일 하기를 열망했을까? 그러나 요한은 할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삶의 현장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현장은 주님이 주신 현장이고 그가 한 일은 주님이 명령하신 일이다. 주님 위해서 믿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을 지켰을때 자신이 잊고 있던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모습이 보이고 기억나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봉양하는 삶의 현장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에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다. 봉양하는 일을 회피하고 싶을때 욕망의 바다에서 있을때 현재형으로 오신 주님의 모습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따분한 일이
원망스러울때 자신을 위해 떡과 생선을 준비하셨던 주님의 사랑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까지 이런 일을 해야
하나 회의가 생기고 질문이 지신을 사로 잡을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서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 주었던 마리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젊고 능력있는 요한이 초로의 노인이 되기까지 노파 한명을 봉양하는 일을
보고 세상사람들속에서 한심하다는 등 억측 소문이 많았다. 헛소문에 시달리며 그 옛날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며 거짓소문을 퍼뜨리던 제자들이 생각나고
그것을 복음서에 기록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나는 빛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사랑한다는 것을 자신을 소진시키는것이다. 할머니 마리아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소진함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온몸을 소진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요한복음만 "나는 양의 문이다"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옛날
이스라엘 목장은 우리에 문을 안달고 문의 문턱에 목자는 자신이 누워서 잠을 잔다. 강도 맹수가 양을 공격하려면 자신을 밟고 지나가야한다.
예수님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요한사도는 마리아가 있는 방의 문턱에 앉아 보호하며 양의 문이 된것 같은 느낌으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된것이다. 세족식역시 마태, 마가, 누가등은 누구도 기억할수 없었다. 하지만 요한사도는 자리에 누워있는 노파의 발을 씻어주며 그옛날 주님의 하신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서로사랑하라. 내가 너를 사랑한것처럼"은 새계명이지만 다른 제자들은
기억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라. 약한자는 강한자의 사랑을 받아라"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너의 상황이 어땠든지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 하셨다. 요한이 생을 바쳐 사랑했던 여인은 예수님의 어머니이다. 많은 여인가운데 독생자의 어머니로 선택해서 세운
마리아이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거동은 불편해서 누워있을 망정 정성을 다해 헌신을 마다하지 않는 요한을 사랑했을 것이다. 자기 몸으로 예수를 놓고
살면서 겪은 누구도 알수 없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요한에게 들려주었을 것이다. 사실 요한은 자신만 할머니가 사랑 생각했지만, 할머니에게서
받는 사랑이 매우 컸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의 계명이 생각난 것이다. 그 다음부터 요한은 자신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쓰기
시작했다. 요한은 할머니 봉양이라는 주님의 명령을 통해 주님이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요한이 마리아와 살았던 에베소는
곳곳이 포도원이다. 요한이 할머니를 위해 시장을 보고 생활필수품 구입을 위해 매일 포도원 곁을 걸어다니며 "너희는 가지"라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배당만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자
요한사도가 요한복음을 쓸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사도가 된것은 주님게서
자신에게 주셨던 삶의 현장을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 이처럼 소중한 복음과 교화의 연결고리는 요한이 지켰던 삶의 현장을 통해
완결되었다. 복음과 교회를 연결시키는 최후의 가장 중요한 고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이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라는 증거는 예배당안에서 만의 증명이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때 비로서 그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임이 증명된다. 예배당안에서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당 안과
밖의 삶이 일치 안하면 교회가 세상에 뎦여져도 어떻게 교회가 세상을 새롭게하는 생명의 원천이 되나?
예배를 나갈때 단지 흩어진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런 그림을 그려보자.
주님은 세상은 어둠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다. 예배당을 나갈때 깜깜한 세상속으로 각각 진리의 촛불이 되어 어둠속으로 흩어진다. 그
진리의 불들이 삶의 현장, 자기 가정에 진리의 빛을 발한다. 주일이 되면 다시 기름을 받고 또 다시 진리의 불로 세상을 빛나게 한다. 어찌 그
교회를 통해 세상이 새롭게 되지 않을수 있을까?
우리는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하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땅끝은 아프리카나 지구 반대편이 아니다. 이곳, 내삶의 현장이 땅끝의 시작이자 종착점이다. 만약 내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수 있는 사람이면, 지구반대에서도 증인이 될수 있다.
여러분들은 이곳 미국에 삶의 둥지를 틀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현장이
경제적으로 곤궁할수도 있고, 태산처럼 많은 문제가 산적할수도 있고, 그 삶의 현장에서 고통을 받을수도 있지만 요한처럼 주님이 그 현장을 주심을
믿고 주님때문에 주님 대한 믿음으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증인이 되시길 바란다. 그때 누구도 들을수 없는 성령의 음성이 들릴 것이다. 잃어버린
성령이 임할 것이다. 잃어 버린 주님의 음성을 성령이 듣게 해주시고 우리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욕망의 바다인 뉴욕을 새롭게
하는 이시대의 진정한 진리의 등대로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이다.
(2005. 10. 19. 아멘넷)
USA아멘넷
http://usaamen.net
100주년기념교회 http://100churc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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