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이재철 - 후러싱제일교회 부흥회

ToBeIsToChange 2006. 3. 26. 10:42

 

                   <제1신>

                 이재철 목사, 후러싱제일교회 부흥회 인도 
                                   

                                 

  이재철 목사

 

   1949년 부산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불문과를 나왔다.
  장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공부와 목회 수련을 거쳐 '주님의 교

  회'를 개척했으며,  개척 초기의 약속대로 10년 임기가 끝나자

  임했다.
  그후 총회 파송 선교사로 스위스 '제네바한인교회'에서 3년간 사

  역했으며, 임기가 끝나고 돌아와 개인 복음전도자로 집필에 전념

  하는 한편 서울의 한 작은 교회 중고등부 교사로 섬겼다.
  2005년 7월부터'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의 부르심을

  받아 '100주년기념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할 예정 
   

   한국의 크리스천 및 신학생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목회자 이재철목사(한국 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교회 담임목사)가 뉴욕을 방문하고 13일(목) 부터 16일(주일)까지 후러싱제일교회(김중언목사)의 부흥회를 인도한다.


   이재철목사는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할 예정이다. 이재철목사는 서울 한 작은교회의 중등부교사로 섬기다가 2005년 7월부터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의 부름을 받아 100주년기념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아멘넷은 이재철목사의 한인이민교회에 대한 내용이 많은 2002년 미주한국일보 인터뷰기사, 가장 최근 근황을 알수 있는 2005년 1월 국민일보 이태형기자와의 인터뷰를 전재한다.


   이재철목사는 크리스천에게 "진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예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한인이민자들에게 "미국땅에서 잘 살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 살기 때문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와 영향를 미치는가를 생각하며 사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민교회 찾은 이재철목사의 언론 최초 특별인터뷰 <2002년10월 미주한국일보>  


   "교회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본질로 회귀해야 합니다"
   이재철 목사를 만나면 '한치의 가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바꿔 말하면 이 시대에 하나님 앞에 투명하게 서 있는 목회자나 크리스천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성경과 역사와 인간의 한계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으로, 잘못 되어가는 세상과 그리스도인을 향해 깨어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재철 목사를 두고 혹자는 '예수님과 가장 닮은 사람', 또 어떤 이는 '예수 믿는 도를 통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이재철 목사를 지난 26일 만났다. 대한기독감리회 오렌지 지방의 초청으로 애나하임 고교 강당에서 3일간 연합성회를 가진 이 목사는 한시간의 만남 동안 시종 우문을 던지는 기자에게 인터뷰인지, 설교인지, 신학강의인지 구분되지 않는 심오한 메시지를 '참으로 신실하게' 들려주었다. 그 내용을 한 페이지의 지면 속에 압축해야함을 매우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해외 한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이재철 목사의 이야기를 정리해 소개한다.


   참고로 이재철 목사는 언론과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 목회자로, 이번 인터뷰는 필자와의 수년간의 교분과 여러 차례 간곡한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근간 '참으로 신실하게'에 관하여 잡지 '목회와 신학'에 서면인터뷰를 가진 것을 제외하곤 일간지로서는 한국에서나 해외를 통틀어 첫 인터뷰임을 밝혀둔다.


   △지난 몇 년 동안 남가주에서 매년 한 번씩 집회가 열렸습니다. 해외 한인교회 들을 자주 찾는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신학교에 다닐 때 다음과 같이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면 40대에는 국내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50대에는 나라 밖의 인류를 위해 삶을 나눌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였지요. 주님의교회 임기가 끝날 때쯤 그 기도가 생각났고 그것이 스위스로 가게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인류를 위해 삶을 나눌 방법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니 내게 맡겨진 일은 해외에 살고 있는 한인들을 신앙적으로 도와 현지에서 외국인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답을 얻었습니다. 그 이후 약 3년 동안 해외 한인들을 주 대상으로 약 50회 집회를 가졌으며 남가주에서는 이번이 6회째입니다. 집회는 내년 말까지만 계속하려고 하는데 거의 스케줄이 차 있습니다.


   △왜 내년말까지만 하려고 합니까?
 
   ▲처음에는 기간을 정하지 않고 다녔는데 워낙 여러 군데서 요청이 오다보니 어디는 하고 어디는 하지 않고, 고른다는 것이 목회자가 할 일이 아닌 것 같고, 이렇게 무한정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담임목회를 하지 않고 집회를 계속 다니면 부흥사가 되는 것인데 그건 제가 가야 할 길이 아닌 것 같아서 내년 말까지로 기간을 정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책을 쓰는 일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목회는 더 이상 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있고 행정이 있는 목회는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목회 13년을 돌아보면 '예배당 없는 목회'였는데 앞으로는 '교회 없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나누고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목회이니까 개인 복음전도자로 평생을 살겠습니다.


   △해외 한인을 대상으로 목회하면서 어떤 점을 느꼈습니까?
 
   ▲사도행전 6장을 보면 당시 초대교회 신자의 대다수가 히브리파 유대인인데도 헬라파 유대인 7명이 안수집사로 선정됩니다. 히브리파 유대인은 자기네와 같은 사람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하는 반면, 외국에서 살아온 헬라파 유대인들은 외국인과 더불어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이들에 의해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지요.
 
   해외에 나와서 사도행전을 읽고 보니 해외교회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국인의 문제는 나와 다른 것은 융화하지 못하는 것인데, 해외한인들은 고향을 떠나 나와 다른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므로 나와 다름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행히도 이민교회는 몸은 헬라파인데, 마음은 헬라파가 되지 못해 자꾸 분열되곤 합니다. 해외 한인교회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서 건강하고 성숙해짐으로써 그 모델이 역으로 한국으로 들어가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길 바랍니다.
 

   △지난 몇년간 미주에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이곳 기독교인들의 변화나 달라진 추세를 봅니까?
 
   ▲직접 몸담고 있지 않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듣거나 이곳 성도들이 보내오는 편지를 보면 이민교회가 융화되기보다는 자꾸 분열되는 모습을 보게 되어 가슴이 아픕니다. 요 근자에 와서는 남가주에 예배당 건축붐이 일고 있는데, 예배당도 필요하지만 교인이 많아서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짓는 것과 지어놓으면 교인이 오리라고 믿고 짓는 것은 다르지요.
 

   △말씀하신 대로 교회들은 예배당을 짓고, 더 크게 개조하고, 또 교육관을 짓고, 건축만 하는 느낌을 줍니다. 주님의교회는 건축헌금을 따로 하지 않고도 정신여고 강당을 지어준 아름다운 선례로 지금까지 회자되는데, 어떤 방법으로 시행됐는지요?
 
   ▲교회건축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지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본질의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 16세기 종교개혁을 봐야 하지요. 가톨릭의 계급 시스템에 반기를 든 종교개혁을 북유럽에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고, 장로교를 포함한 개신교회는 교인을 대표한 장로들의 대의정치라는 '시스템'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미국으로 건너갔고 한국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교회는 시스템이 아니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라는 공간이 중요하고 건축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건축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교회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본질로 회귀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복되면 건축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만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어떤 답을 내어도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미주교포사회에는 크리스천 인구가 많습니다. 70% 이상이라는 통계도 있고, 목사와 교회도 갈수록 많아지는데 그 때문에 사회가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부작용이 심합니다.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 보이는 첫번째 현상이 성직자의 급증입니다. 불교가 번성했을 때 고려 천지가 스님들로 넘쳐났던 것이나, 가톨릭이 타락했을 때 온 유럽에 신부지망생이 줄을 이었던 것을 역사가 증명합니다. 고등종교와 하등종교의 차이는 신 앞에서 '자기 부인'이 있는가 하는 점인데, 고등종교의 타락은 자기 부인을 상실했다는 것이고, 성직은 굉장히 좋은 직업이 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직자가 유례없이 많다는 것은 목회자 뿐 아니라 교인도 똑같이 자기부인을 상실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70%의 교인은 있지만 정말 진리와 말씀 앞에서 자기부인하는 성도가 얼마나 있는가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 현상은 성직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세우는 신학교, 연구소, 교회 등 종교기관의 급증입니다. 세 번째는 신앙의 기복화입니다. 종교기관들이 서로 경쟁자가 되면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본래의 메시지보다 성도들이 듣기 좋은 기복신앙을 강조하게 되는 거죠. 따라서 타락한 종교 뒤에는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는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문제는 바로 나, 개인 각 사람의 문제입니다.


   △목사님의 개인생활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은데요, 가정을 소개해주시죠.
 
   ▲아내(정애주)가 홍성사를 운영하고 있고 아들이 넷 있습니다. 고3, 고1, 중1,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고 있지요. 제가 3년 동안 스위스에 떠나 있었고, 지금도 집회 다니느라 집을 많이 비워서 미안한데 밝고 건강하게 자라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어느 교회에 다닙니까?
 
   ▲산울교회라고, 우리 여섯식구를 포함해 40명 정도 출석하는 작은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장신대 2년 선배이고 숭실대 국문과 교수인 조성기 전도사가 담임하는 교회인데 저는 고등부 교사로 봉사하고 있지요.


   △미주교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저는 해외에서 살고 있는 한인 크리스천들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을 받습니다. 세계 어느 민족 중에서도 한인들처럼 해외에서 어렵게 살면서 하나님을 잘 믿어보려고 열심인 민족이 없습니다. 그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잘 통합되어서 아름다운 삶으로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또한 교인들은 미국땅에서 잘 살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 살기 때문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와 영향를 미치는가를 생각하며 사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재철 목사는 39세에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어 '주님의교회'를 통해 본질을 회복한 교회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목회 초기에 스스로 정한 10년의 임기에 따라 1998년 6월 주님의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했으며, 그해 9월부터 스위스의 제네바한인교회에서 가족과 떨어져 3년간 목회한 후 지난 해 임기를 마치고 귀국했다. 현재는 집회와 집필로 전세계 크리스천들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다. '믿음의 글들' 시리즈를 내는 주식회사 홍성사의 발행인이며, 저서로는 '믿음의 글들, 나의 고백', '새신자반', '회복의 목회', '회복의 신앙',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참으로 신실하게' 외에 여러 권의 설교집이 있다.

 


                     이재철 목사 신년대담 <2005년 1월 국민일보>
                    
…“‘황제의 논리’ 벗어나 진리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이재철 목사는 한국의 크리스천 및 신학생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목회자 가운데 한명이다. 서울 주님의교회를 개척,부흥시킨 뒤 약속대로 10년만에 교회를 사임하고 홀연히 스위스로 떠나 제네바한인교회를 담임하다 귀국,현재 산울교회 중고등부 교사로 섬기며 집필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이 목사는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는 목회자로 유명하다. 국민일보와도 이번이 공식적으로는 최초의 인터뷰다. 이 목사는 크리스천들이 ‘황제의 논리’를 벗어나 거룩한 진리의 법칙에 따라 살 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목사가 말하는 목회와 예배,크리스천의 삶에 대해서 들어봤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산울교회라는 작은 교회에서 중고등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집필과 강연은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는 27일부터는 매달 한 차례씩 서울극장에서 청년들을 위한 ‘극장 예배’를 인도하게 됩니다.


   -극장에서 드리는 예배는 참으로 신선하군요. 예배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참다운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는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자기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것처럼 온전하게 나를 하나님께 의탁하는 시간이 바로 예배입니다. 자기 의탁이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내가 죽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고 그 분과의 영적인 접촉 속에서 새로운 힘을 얻어 한 주간의 인생 고비를 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사실 요즘의 예배를 보면 하나님께 나를 드린다는 부분이 너무나 소홀합니다. 드린다고 할 때 예배를 받으시는 주체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요즘의 예배는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예배가 대부분입니다. 본질에서 벗어나 있지요.
 

   -그러면 참다운 예배의 회복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교회의 본질을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시스템이나 외형적 구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 사람들은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구별을 다르게 표현하면 거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성을 상실하면 크리스천들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성도들이 드리는 참다운 예배는 거룩성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힘과 예배의 힘은 외형적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있습니다. 세상과 구별된 힘이 세상을 변형시키는 동력이 되는데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될 때 굳이 개혁을 말하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개혁은 수반됩니다. 역설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개혁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지금의 교회가 힘을 잃었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본연의 힘을 지니고 있으면 개혁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그같은 놀라운 고백을 한 장소인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있었던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논리가 판을 친 그 도시에서 베드로에게 ‘로마 황제가 신이냐,아니면 너희 눈에 보이는 내가 참 신이냐’를 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황제의 논리가 만연된 도시에서 당시로서는 거지와 같았던 예수님을 가리키며 ‘당신이 참 신이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세상을 압도하는 황제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거룩한 진리의 법칙을 따라 살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고백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사를 볼 때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킬 때는 항상 교회가 황제의 논리를 초월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황제의 논리에 몰입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교회가 예수님의 진리 법칙만 따르면 굳이 개혁을 말하지 않아도 교회 자체에 의해서 역사는 밝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요 희망인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대다수는 황제의 논리를 쫓아 갑니다. 항상 깨어있는 소수만 황제의 논리를 초월합니다. 오늘날의 세태 자체를 보면 절망하기 쉽습니다. ‘왜 너는 교회답지 못하냐’고 비판하기보다는 내가 주님의 교회로서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시급한 명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는 항상 새로워 집니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사람에 의해서 세상은 바뀌어집니다. 우리가 싸울 상대는 밖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우리 각자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참다운 교회로 나 자신을 세우는 것,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숙제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결과적으로 세상의 불의나 부조리를 묵인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의 부조리를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내 삶의 영역에서 모든 악한 것과 스스로가 맞서는 것입니다.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상인은 상인대로,교사는 교사대로 적어도 자신의 영역에서는 불의를 행치 않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가 참된 교회로 바로 서는 데에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이 거꾸로 가더라도 나 혼자는 바로 간다는 강한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가는 것도 용기 있지만 내 삶의 터전에서 스스로 진리의 사람으로 서는 것은 더욱 진정한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그같은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지킨다면 대한민국은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사회책임 등과 같은 단체에서 목사님을 영입하려 한다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사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이 있습니다. 기독교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그 소명을 받은 분들입니다. 저의 소명은 그저 이 시대에 내게 주어진 삶 속에서 썩어지는 한알의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일이 의미롭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소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같은 일에서 저는 무자격자입니다.
 

   -목사님은 인생의 많은 과정을 거치시고 목사가 되셨습니다. 목회자가 됐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또한 목회란 과연 무엇입니까.
 
   △목회자가 됐다는 것과 목회를 한다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목회는 교우들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목회자는 어쩔 수 없이 교인들의 본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고 제일 앞장서서 ‘우리 다같이 이렇게 살아보지 않겠습니까’라면서 선봉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목회자의 진정성은 강당이 아니라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본인은 선봉장이 될 생각이 없어도 교인들과 함께 살아가다보면 하나님에 의해서 선봉에 서게 되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그러면 목회의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제게 ‘언제 목회를 다시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교회 없는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목회라고 하면 교회와만 연관짓는데 저는 신학교때 50대엔 나라 밖 사람들을 위해서 제 삶을 나누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 서원대로 해외 한인 크리스천들과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책을 쓰는 것도 목회지요. 저는 한번도 목회를 그만둔 적이 없습니다. 교회를 담임하는 여부를 떠나 죽을 때 까지도 목사로서 목회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즉 크리스천이 됐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이 바뀐 사람입니다. 한줌의 재로 끝날 허망한 인간이 영원한 존재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신분의 변화에는 그에 걸맞는 수준이 요구됩니다. 신분에 걸맞는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바뀐 신분을 즐거워만 하고 그 신분에 걸맞는 수준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파탄나게 됩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바뀐 신분에 대한 기쁨만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수준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21세기 한국교회는 하나님 자녀다운 수준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분은 저절로 주어지지만 수준은 사도 바울이 날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과 같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신분에 안주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나의 전유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이 탁월한 수준을 추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될 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세상 잘못을 내 탓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의미로웠던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시죠.

 

   △목회자로 살 정도의 수준이나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주님이 나를 도구로 쓰신다는 사실에 감격합니다. 날마다 의미롭게 지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나를 주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요구하기 이전에 무엇이든 나를 주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아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진짜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예수의 말씀을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아는 것을 넘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진짜 크리스천으로 새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 중심이 확고하게 주님을 향해서 방향 설정이 되지 않으면 새해는 늘 묵은 해의 연장선밖에 되지 않습니다.
 
   새 것은 옆이나 밑에서부터 오지 않고 오직 위로부터만 옵니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 땅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새해를 맞이하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서야 하는데 그 때 후회함이 없어야 합니다.
 
   (2005. 10. 13. 뉴스파워  / 뉴욕,이종철 기자)

 

 

 


            <제2신>     

              역시 이재철목사, 변화가 일어나는 복음을 전하다. 


  

   한국의 크리스천 및 신학생들이 가장 만나고 싶은 목회자 이재철목사(100주년 기념교회)가 후러싱제일교회(김중언목사)의 30주년 기념부흥회를 10월 13일(목)부터 16일(주일)까지 인도하고 있다. 이재철목사는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요 21:1-25)"라는 제목으로 4일 동안 강해식으로 진행한다.


   13일(목) 저녁 8시 30분 열린 첫날 집회는 예배당을 만원을 이룬 가운데 열렸으며 이재철목사는 40여분동안 조용하지만 확신있는 목소리로 말씀을 전했다. 예배가 끝난 후 김중언목사와 입구에 서서 성도들과 일일히 악수를 나누었다. 이날 참가한 고등학생들은 이목사의 말씀을 듣고 목사가 되겠다고 결신하는등 복음의 진수를 보여준 말씀으로 참가한 교인들에게 변화를 주었다.


   김중언목사는 이재철목사를 "소개가 필요없는 훌룽하신 목사님이다. 목사님이 오신다고 하니 많은 문의전화가 왔다. 3년만에 미국에 오셨다"고 소개 했다. 아래는 말씀 요약이다.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여러분이 교회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항상 복음이 중요한 것이다. 교회가 교회자체를 중요하게 여길때 교회는 이기적 집단이 된다. 기독교 이천년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교회는 복음 때문에 중요하다.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다. 여러분이 지금 있는 이곳은 예배당일 뿐이다.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여러분이 바로 교회이다. 만약 이러한 고백없이 세워진 교회가 있다면 교회가 아니다. 그러면 동일한 고백아래 교회가 세워졌다면 왜 모든 교회가 동일하지 않나?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총론에 지나지 않는다. 총론은 분명한데 각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면 그런 일이 일어 날수 있다.


    요한복음의 21장은 복음과 교회를 연결시켜주는 연결고리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은 매우 중요하다. 4복음서의 마지막 장이다. 그곳에 결론이 다 들어가 있다. 그다음에 교회역사를 밝혀주는 사도행전이 시작된다. 따라서 21장은 바로 복음과 교회를 연결시켜주는 연결고리이다.


    삶의 현장에서 먼저 증인이 되어야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땅끝에 관심을 두고 부담감으로 살아간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이 부활후 제자들을 땅끝으로 보내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라 하셨다. 그들은 갈릴리 사람이었고 그곳은 가족이 있는 곳이었다. 갈릴리는 그들의 삶의 현장이요 터전이었다. 그러면 주님이 왜 그들을 땅끝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갈릴리로 보냈는가?

 

   만약 자기 삶의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면 땅끝증인이 될수 없다. 내삶의 현장에서 역활하는 체 살아가는 연기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삶의 제사를 원하신다. 삶의 현장에서 먼저 증인이 되어야 한다. 갈릴리는 히브리어로 "고리"라는 의미가 있다. 땅끝은 아프리카나 지구 반대쪽 나라가 아니다. 같은 방향으로 계속가면 지금 서있는 이곳이 땅끝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할수 있어야 한다.


    욕망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교회로 살아가야 한다


   교회인 우리가 살아가는 이세상은 결코 수도원이 아니다. 심산계곡도 아니며 허허벌판도 아니다. 욕망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교회로 살아가야 한다. 주일 하루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욕망의 바다 한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쫓아 살아야 한다. 큰 교회란 교인이 많음과 제도에 달려있지 않다. 성도가 얼마나 진리를 쫓아 사는지 달려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제물을 드리면서도 욕망을 쫓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이 뉴욕에 나타날때 백인, 흑인, 동양인이 "할렐루야"라고 외치면 예수님은 그들을 보고 기뻐할것인가? 아니면 눈물을 지을 것인가? 그 답은 자신들이 다 안다. 욕망의 논리로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 진리만이 욕망을 제어할수 있다.


   교회가 무력하고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 교회가 진리를 쫓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바다에 침몰하는것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과연 우리의 우선 순위는 무엇인가? 과연 그리스도인가?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앞에서 정직히 구분하지 않는다. 주님은 보이지 않지만 세상의 유혹은 거대한 바다와 같다.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돈이 더욱 최고의 가치가 되고 있다. 참된 교회가 되어야 주님의 진리를 찾을수 있다.


    나를 믿는 주님의 믿음을 깨달아야


   사람들은 내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우리를 믿으시는 주님의 믿음에 비하면 그것은 믿음도 아니다. 주님은 배신을 했어도 믿음을 주시는 분이다. 나를 믿는 주님의 믿음을 깨달아야 한다.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인공중 하나인 이영표선수와 대화할 기회가 있어 "다른 팀에 비해 전력이 떨어지는데 어떻게 4강에 들어 갈수 있었나?"고 질문한 적이 있다.


   이영표선수는 "프로는 몰래 몸을 던질수도 사릴수도 있다. 히딩크감독은 선수들에게 실력 이상의 투혼을 발휘할수 있는 힘이 있다. 그것은 선수에 대한 믿음이다. 히딩크감독은 전반전에 출전한 선수를 부상등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교체를 하지 않는다. 전반전에 충분히 기회를 주고 전반전이 끝나서야 선수를 교체한다. 감독의 선수들에 대한 믿음이 4강의 가장 큰 이유이다"라고 말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내가 그 믿음에 응답할때 진정한 금자탑이 세워지지 않겠나?


    하나님을 현재형으로 기억하자


   이세상에는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세상사람들을 하나님을 믿게 만드면 욕망의 바다에서 진리의 등대로 살아 갈수 잇다. 성도들이 주일에만 예수를 만나고 예배당을 나가면 주머니에 예수님을 넣고 예수님을 과거형으로 알고 예수님과 무관하게 살아간다. 아무리 영성훈련을 받고와도 예수님을 과거형으로 생각하면 영성이 없는 것이다. 간증집회는 과거의 은혜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현재형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성경공부하고 나가다 문제가 발생하면 하나님은 과거형이 된다. 예배당안 만의 신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과거 현장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현재형이며 내일도 현재형이다. 주님이 현재에 있다고 깨닫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가 될수 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교인과 프로그램이 많아야 좋은 교회가 아니고 주님이 현재형으로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다. 그런 교회만 세상을 새롭게 할수 있다.


    아이들의 심정으로 대답할때 주님을 만날수 있다


   주님을 안 따르고 욕망의 법칙을 따르면 큰집과 좋은 자동차를 가질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빈손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것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화려했던 로마는 오늘 페허가 된 유적지 밖에 없다. 오늘도 무엇인가 세상의 것을 채우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내 능력으로 일을 성취할수 있다는 생각이 산산조각 났을때 현재형의 주님을 만날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애들아"하고 불렀다. 현재형 주님이 우리를 부를때 아이들의 심정으로 대답할때 주님을 만날수 있다. 믿음의 성숙은 주님앞에 어린아이의 심정을 잃지 않을때 이루어진다.


   내가 혼자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진다. 서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주님앞에 아이가 될때 삶의 현장에서 현재의 주님을 만날수 있다. 후러싱제일교회는 30년동안 많은일을 한 것으로 안다. 많이 했다고 생각해도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생각하면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번 30주년을 통해 뒤를 보는것이 아니라 앞을 보아야 하며 현재의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교회가 아이의 마음을 가질때 앞으로 30년간 이전과 비교할수 없는 은혜를 주실것이다.


    참된교회는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때 세상의 빛


   실패와 절망의 경험을 통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순종하면 지혜로운 사람이다. 낮디 낮은 마음이 필요하다.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건져 올리는 것이 필요하다. 건져 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허공에 산 것이며 건져올린 사람만이 긴 인생을 사는 것이다. 무엇으로 그것을 건져올릴수 있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그것을 건져 올릴수 있다. 내 욕망으로 건져낼려고 하면 그물인 교회가 찢어진다. 좋고 나쁜 교회는 예배당에서 가려지지 않는다. 살인자도 예배당안에서는 분위기로 순간적으로 거룩할수 있다. 참된교회는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때 세상의 빛이 될수가 있다.

         

    (2005. 10. 13. 아멘넷)

 

 

 

 

        <제3신>

            이재철목사, 지하무덤에서 시작한 초대교회의 정신을 본받자.
 
 
   후러싱제일교회(김중언목사) 부흥회 두번째 날을 맞이하여 이재철목사(100주년 기념교회)는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요 21:7-14)"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재철목사는 10월 13일(목)부터 16일(주일)동안 저녁 8시 30분과 주일 1-3부를 인도한다.


   참가한 교인과 외부인들은 시작 1시간전부터 모이기 시작하여 행사가 시작되는 8시 30분에는 예배당을 다 채웠다. 이날 참가한 한 교인들은 "은혜를 많이 받았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놓치고 사는 것을 정확히 지적해 주시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전 첫날과 같이 후러싱제일교회 로고스 찬양단이 수준높은 찬양을 들려 주었다. 아래는 말씀 내용이다.


    나는 안보이고 하나님만 나타나는 예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예의의 관계이다. 내가 혼자만 예의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예의를 갖추시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 그 예의는 예배를 통해 절정에 달한다. 제자들의 세족식 후 의관을 정제하고 제자를 대한 예수님처럼 주일예배를 맞이 해야 한다. 주일예배시간은 구역모임처럼 교제의 시간이 아니라 예의를 다하는 시간이다. 예배를 통해 진정으로 큰 절을 하면 나는 안보이고 하나님만 나타나게 되어 있다.


   제사를 드릴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직접 제물을 잡고, 제물의 껍질과 각을 뜨고, 내장을 씻어 바쳤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정결케 해달라고 기도했다. 제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의 몸은 더럽고 냄새가 났지만 죄사함을 받은 기쁨이 있었다. 그런 사람은 사회에 나가도 죄를 짓지 못한다. 신약에 들어와 예수그리스도가 영원한 제물이 되어 주셨다. 주일날 예배당에 들어와 내 영혼의 각을 뜨고 "나는 없어지고 하나님의 말씀만 들리게 해주십시요"하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만약 그런자세로 예배에 참가하면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해도 은혜를 받는다. 요즘 교회에서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를 즐기고 비평하며 감상한다. 예배를 통해 각자가 죽고 일주일을 살아갈때 우리는 진정한 교회가 될수가 있다.


    진정한 봉사는 나는 하나님앞에 한톨 먼지도 안된다는 마음가짐


   어머니는 자기의 입맛보다는 남편과 자식의 입맛을, 먼저 먹지 않고 기다리며, 댓가 없이 서비스를 한다. 그렇게 어머니는 평생을 봉사를 하셨다. 하지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생각을 하면 그때부터 참봉사가 아니라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참된 교회는 예수님과 진정한 어머니처럼 평생 봉사하고도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 많은 교회이다. 어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봉사하는 것은 문제이다. 어떤 댓가를 바라면 봉사하는 것은 더욱 문제이다. 진정한 봉사는 최선을 다하지만 나는 하나님앞에 한톨 먼지도 안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봉사했는데 나를 괄세하느냐"라는 생각을 가지면 교회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툴어 진다. 누구에게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과 어머니의 마음으로 봉사할때 주님이 하시는 탓치(Touch)를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삶을 살아야


   믿음은 주님을 향한 시선이다. 신앙에 의문이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나의 문제만 보고 주님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을 바라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단군교 교주가 개종을 하여 담임하는 교회의 성도가 되었다. 그 사람과 같이 단군교 성전에 가서 단군그림을 없애는데 그가 사시나무같이 떨었다. 그 사람은 그것을 평생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단들은 교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집에 교주의 사진을 걸어놓게 한다.


   사도바울 후 최고의 변증가 CS 루이스는 "그리스도는 주님을 쳐다보는 순간만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했다. 목회자라도 시선을 그리스도에 고정하지 않으면 욕망의 바다에 빠진다.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우리의 시선을 주님에게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주님에게 시선을 고정하면 모든것이 명확해 진다. 노아의 방주에는 천정에만 창이 있었다. 그때 세상을 볼수 있는 창이 있었다면 미쳤을 것이다. 천정의 창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 보게 하셨다. 좋은 교인이란 말씀을 통해 영혼의 천정에 난 창으로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에 시선을 고정 해야만 붙잡아야 할지 놓아야 할지 명확하게 알게 된다.


    시체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어야


   성경에서 두 부분외에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죽은자 가운데에서 살아 나셨다"라고 표현했다. 예수님은 시신상태에서 살아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이론적으로는 믿는데 삶속에서는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을 설교하는 목사가 자신의 아들이 죽자 그 죽음을 못받아 들이는 경우도 있다. 그 목사는 예수님이 머리에만 있었던 것이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있는 비석을 본적이 있다. 한 비석에는 "항공기 추락으로 인류발전에 공헌할수 있었는데 아깝다. 명복을 빈다"라는 내용이 있었고 다른 비석에는 "그의 기쁨의 삶은 주님과 더불어 계속되고 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누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인가?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에 들어 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럼에도 나의 죽음은 못 받아 들인다. 내가 결국 시체가 되고 우리는 죽음을 코 끝에 달고 산다는 것을 통감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된다. 그렇게 믿지 않고 입으로만 말하면 삶의 신앙이 아니다.


   뉴욕에서 2년 만에 만난 교인이 있었다. 최근 그가 심장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에 들어가기 전 천상병 시인의 "소풍'이라는 시처럼 다음같이 기도를 했다. "주님! 세상에 소풍와서 남편을 만나 아름다운 것도 많았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기쁘게 가겠습니다. 하지만 살게 해주시면 이전보다 훨씬 아름답게 살겠습니다". 죽음을 받아 들이면 죽음은 두렵지 않는다. 참 그얼굴이 밝고 아름다웠다. 로마 초대교회는 지하무덤에서 시작되었다. 초대교회는 시체를 보면서 시체가운데 살아나신 주님을 믿었다. 자신이 시체임을 알고 시체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2005. 10. 14. 아멘넷)

 

 

    USA아멘넷    http://usaamen.net

    100주년기념교회   http://100church.org 

 

 
 

      <제4신>

    이재철목사, "두팔을 들고 전폭적으로 주님이 인도하심을 받으라!" 


   

   후러싱제일교회(김중언목사) 부흥회 세번째 날(15일/토)을 맞이하여 이재철목사(100주년 기념교회)는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날 이재철목사는 영락교회 전도사가 된 경위, 처음 교회를 개척한 이야기, 스위스교회로 떠난 이유, 극장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이야기, 100주년 기념교회를 담임하게 된 하나님의 역사들을 간증식으로 전해 주목을 끌었다.

 

   목회란 사랑과 함께 교우들과 더불어 사는 것

 

   주님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떡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생명이었다. 그랴서 터질것 같은 감동이 있는 것이다. 진수성찬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른 떡 한조각으로도 상대를 감동시킬 수가 있다. 그것은 음식 만드는 사람의 사랑이다. 사랑이 통할때 마른 떡 한조각으로도 사람이 행복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1988년 주님의 교회를 시작했을때 목회자로서 인턴과정을 밟지 못했다. 영락교회 전도사를 하다가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교회에 상처받으신 분들이 교회를 시작하자고 부탁을 했는데 응답하지 못하다가 계속하여 그분들이 교회를 정하지 못하자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목회란 교인들을 열심히 성경공부시키고 설교만 잘하면 되는줄 알았다. 그런데 교회에 회의가 많은 것에 놀랐다. 또한 의견들도 다 달랐다. 그래서 개척한지 10개월이 지난후 이것은 아니다 싶어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목회란 그렇게 교우들과 더불어 사는 것 이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이 목회의 중요한 본질임을 알았다.

 

   89년 4월 예배처소인 YMCA 의 앞자리에 앉아 그만두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기척이 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교인이 "전도사님, 이것 가지고 가세요"라고 보자기를 주었다. 그것을 잡으니 따뜻했다. 그것은 검은 팟으로 "축! 생신"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시루떡이었다. 새벽 5시에 떡을 따뜻하게 만들어 올려면 그분은 밤을 새운 것이다. 동역자들과 떡을 나누어 먹으며 떡맛을 모르고 울며 먹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이런 교우들과 함께 라면 목회를 계속해야한다는 결심을 했다. 떡이 내 목회관을 바꾸어 준것이다. 사랑은 그래서 중요하다.

 

   사랑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실수를 했다고 짜르고 쫓아 내는 것은 기업의 논리이다. 사랑은 기회를 다시 주는 것이다. 그것을 받고 안 받고는 상대의 문제이다. 사랑은 높은 곳에 서서 그곳으로 상대를 올라 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 상대의 수준으로 쳐다 보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수준으로 오셔서 우리를 품고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 가셨다. 욕망의 바다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사람을 도구로 이용한다. 욕망의 바다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이다.

 

   나와 다른 것으로 내가  없는 것을 보완하는 조화와 일치를 알라

 

   우리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동등하게 보지 않고 내려다 보는 마음이 더 크다. 하지만 그도 주님 앞에서는 소중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생명의 존엄성은 주님앞에서 동등한 것이다. 그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 주어야 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기가 가장 힘들다. 라이벌은 어원이 리버(강)에서 왔다. 같은 강물을 먹는 사람은 경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른 교회보다는 같은 교회 교인끼리 경쟁상대가 되기 쉽다.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품어야 한다. 한국사람들은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면 모함하고 끌어내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자기보다 높은 것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마굿간 구유를 침대로 삼으셨다. 요즘은 아무리 가난해도 밥통을 침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주님은 가장 바닥에서 시작해서 어려운 사람을 이해 하신다. 또 하나님은 천하 제왕보다도 높으신 분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고독과 사장의 외로움도 이해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주님 주위에는 가난한 사람부터 부유한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만약 특정 부류만 모이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백인 흑인등 특정 인종만 모이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남녀노소 빈부를 떠나 한자리에 같이 모일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을 본 받아 모든 사람을 수용할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한 사진작가는 스냅사진외 풍경과 사물사진을 찍을때 함부로 찍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소나무를 찍는다고 하면 아침과 저녁, 비올때와 맑을때 그곳을 방문하여 소나무의 마음을 먼저 느낀다고 한다. 소나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들을때 비로서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은 사진은 의미가 없다. 왜 나와 코드가 맞지 않은 사람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의문이 들수도 있다. 하지만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배척하지 않고 공감과 이해를 하고 상대의 입장에 서는 것이 필요하다. 조화를 이룰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주님은 일방적인 사랑보다는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서로 이해하는 것이 서로를 사랑하는 출발점이다.

 

   나는 결혼한지 20년이 되었다. 아내가 문단속을 못해 문은 꼭 내가 잠근다. 처음에는 아내가 참 한심했으며 짜증났다. 아내는 군인의 집안에서 자라나서 도둑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나는 3번이나 도둑맞은 경험이 있고 도둑을 따라가다가 큰일날뻔 한적도 있었다. 외국에 가는 때면 아이들에게 문단속을 부탁한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내게 없는 하나님에게 대한 신실한 믿음이 있어 방황하는 내가 바로 설수 있게 해 주었다. 서로 모자라니 그래서 부부되게 하심이 아닌가? 나와 다른 점이 있어 배척할것이 아니라 내가  없는 것을 보완하는 조화와 일치를 알때 만인을 위한 보편한 교회가 될수 있을 것이다.

 

   두팔을 들고 전폭적으로 주님이 인도하심을 받으라

 

   믿음은 주님에게 두 팔을 벌려 항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이끌림을 받는 것이다. 신앙연륜이 깊을수록 내가 원하는 대로 주님을 끌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해 두팔을 벌리고 전폭적으로 주님에 의지할때 주님의 계획이 펼쳐지게 된다. 지나간 인생을 돌이켜 보아라. 여러분이 한일이 더 많은가? 아니면 되어진 일이 더 많은가? 우리는 무엇을 할려고 하지만 대부분 무산이 된다.

 

   아내는 신실한 크리스챤 이었지만 믿음이 없는 나는 오직 선데이 크리스챤이었다. 목사가 될려고 신학교에 간것이 아니었다. 하도 방황해서 삶의 공간을 바꾸지 않으면 살수가 없어 나를 주님에게 묶을려고 신학교에 갔다. 당시 외국인 회사에 다녔는데 본사가 쌍룡빌딩에 있었다. 빌딩의 창문을 통해서 당시 한국의 최고교회였던 영락교회가 보였다. 어머니의 신앙의 씨앗으로 목회자가 되면 저런 교회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신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영락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교육전도사를 뽑으니 이력서를 제출하라는 것이다. 인선위원들은 전에 있던 젊은 전도사가 일을 벌려 이번에는 가장 나이가 든 사람을 전도사로 뽑았다. 나는 37살에 신학교에 들어갔다.

 

   나는 교회의 담임목사의 자격이 없다. 흠없는 사람이 교회를 세워야 하므로, 더우기 개척교회 목사로서의 자격은 더욱 없다.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가 성장할때 까지 내가 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 주님에 의해 되어진 것이다. 10년 후 교회를 떠난 것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소문나니 목회자들이 가고 싶어하는 많은 교회에서 청빙이 왔다. 하지만 내가 갈 필요가 없었다. 그때 스위스에서 연락이 왔다. 20년된 교회인데 어려우니 가족을 두고 혼자와서 3년을 봉사하라는 황당한 제안을 받았다. 나중에 이야기를 듣기에는 스위스가 아름다워 목회자들이 갈려고 했지만 스위스의 물가가 비싸고 내부형편도 좋지 않아 포기 했다는 것이다. 그곳으로 가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남이 가기 원하면 내가 갈 필요가 없지만, 갈 사람이 없으면 내가 가야 한다는 생각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그곳에 갔다. 스위스는 유럽의 중간에 있어 그곳에 있는 3년동안 평생배워도 다 배우지 못할 정도로 2000년 기독교역사와 현실을 읽고 배워 귀국했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작년에 서울극장을 운영하는 자형이 극장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기 원하니 나보고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가장 큰 900석의 극장을 사용하면 2번 극장상영을 못하게 되고, 1회 2000만원의 손해가 난다는 계산이었다. 일주일에 한번은 무리가 있어 한달에 한번씩 모임을 가진다. 음악인와 먼저 공연을 하고 내가 설교를 한다. 술취한 사람등 누구나 올수가 있다. 목사들 가운데 그런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당시 이재철목사가 얼마내고 그것을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하지만 이것을 내가 요청한다고 되는 일인가. 되어진 일이고 하나님이 역사 하신 것이다.

 

   양화진은 개신교 최고의 성지이다. 20년전 한국 기독교의 원로들이 쓰레기장을 성역화해서 선교기념관을 세웠다. 외국인들이 출석하는 유니온교회가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기념관의 주인처럼 행동했다. 주님의 교회를 하다가 더 넓은 에배처소가 필요해 주일날 예배당을 사용하자고 유니온교회에 편지를 보냈으나 한국인은 안된다고 거절 당했다. 20년을 그곳에 산책하면서 한국인이 지은 저 건물에서 한국인이 예배를 드릴수 없음을 가슴 아파 했다. 금년 4월 기독교 100주년 기념위원회에서 100주년 기념교회 담임목사를 요청해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런데 교회가 있는 곳이 바로 선교기념관 이었다. 양화진이 다시 한국인의 성지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것도 내가 의지해서 된것이  아니다.

 

   두팔을 들고 하나님에 의지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나는 구체적인 미래의 계획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할것이냐고 묻지만 나의 대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나는 끌려 갈뿐이다. 그렇게 끌려 갈때 아무도 상상할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진다.

 

   주님을 올바르게 따르지 않으면 헛소문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요한복음 마지막 구절에 제자가 거짓말하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가 나타나는 사도행전이 시작된다. 이것은 중요한 메세지가 있다. 교회가 거짓과 헛소문의 진원지가 될수 있다는 말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건물과 제도가 아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을수 있는 곳이다. 대기업도 부서사람 중심으로 몇 십명과 인간관계를 맺지만, 교회는 수백명과 관계를 한다.  교회는 주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진리에 이탈하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거짓의 진원지가 된다. 교회생활을 오래 할수록 거짓 소문에 가슴앓이 한 분이 많다. 나도 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지만 99%가 거짓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거짓소문을 퍼트렸는데 교인들도 쉽게 피해자나 가해자가 될수 있다.

 

   욕망의 바다에 빠진 우리를 주님은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다. 하지만 소를 물가로 끌고 가는 것은 쉽지만 물을 먹이는 것은 쉽지 않다.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다. 주님을 따라 간다는 것은 내가 주님안에서 만나고 밤낮 주님과 동거하고 주님의 사고로 사는 것을 말한다. 제자들이 거짓소문을 낸것은 빛의 자리로 인도함을 받았지만 그곳에 주님이 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에 인도되어도 주님안에서 살지 않을수가 있다.

 

   71년 대학을 졸업했지만 70년 11월부터 외국인회사에 다녔다. 프랑스대사와 친분이 있어 대사관에 와서 근무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국비로 유학도 보내주는 좋은 조건이었다. 결정하기가 힘들어 언론기관에 있는 4째 자형에 개인문제로 의논할 것이 있다고 연락하고 집에 찾아 갔다. 누나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골려 주려는 생각으로 당시 내가 신춘 문예작품으로 썼던 소설(대학생과 레지의 사랑)의 내용을 장난삼아 말하고 술에 골아 떨어졌다. 사태는 돌이킬수 없는 상태가 되고 집안은 난리가 났다. 다음날 누나 5명과 어머니가 계신 자리에서 해명을 하는데 사실을 다 말했지만 누나들은 나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말을 믿어라. 저렇게 말할때는 진심이다"라고 말하자 문제는 끝났다. 어머니는 나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내 진심을 알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예수그리스도와 동거하고 주님과 함께 살아 간다면, 말을 옮기고 상처를 주는 주인공이 될수는 없다. 주님을 올바르게 따르지 않으면 헛소문의 상처를 받을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사랑의 교회가 될수 있다.

 

   믿음이란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을 간섭하지 않는 것

 

   믿음이란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을 간섭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86년 영락교회의 전도사부터 많은 행사를 주관했지만 한번도 날씨를 위해 기도한 적이 없다. 그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 내가 기도해도 하나님의 섭리가 비가 오는 것이라면 비가 온다. 어떠한 날씨라도 주님의 일이 잘 이루어 지도록 기도할 뿐이다. 부모들은 자식의 배우자를 생각하며 외모/학력/직업/나이를 주님에게 통고한다. 주님은 그것에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다. 기간이 지나보면 내적이 아니라 외적 중심의 조건을 더 고려한 사람들은 행복을 구하기 힘들다. 주님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절대로 완성된 보석을 주시지 않는다. 원석을 주셔서 셋팅하도록 하신다. 그 가운데 행복을 느낄수 있다. 우리는 그 원석을 볼수 있는 혜안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내가 아는 한 집사는 한국의 소문난 기독교 가문의 며느리이다. 남편과 결혼할때 그는 불신자 였다. 아들이 그 집사를 부모에게 소개를 시키자, 시부모들은 처음에 충격을 받고 실망했지만 마음을 추스리고 며느리에게 "아들이 믿지 않은 너를 선택한 것이 뜻 밖이고 실망스럽지만 아들이 믿음으로 너를 선택했고 네가 기도의 응답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가족과 더불어 좋은 신앙인이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하며 결혼을 승낙했다. 그 이후 집사는 주일에도 집에서 쉬며 교회에 가지 않았지만 시부모들은 한번도 교회가자고 권유하지 않고 친딸처럼 대해 주었다. 집사가 미안해져서 효도차원으로 동네 예배당의 특별새벽기도회에 자발적으로 나갔다. 예배당에 발을 들여 놓으니 "애야, 왜 이제야 왔느냐?"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후 그 집사는 참된 신앙인이 되었다. 시부모들은 믿음의 응답으로 며느리가 왔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그 부분은 자기들이 관여해야 할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역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된다.

 

   (2005. 10. 15. 아멘넷)

 

 

 

 

                <제5신>  
           이재철목사,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는 삶의 현장"
 
 
   후러싱제일교회(김중언목사) 부흥회 마지막 날(16일/주일)을 맞이하여 이재철목사(100주년 기념교회)는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재철목사는 4일동안의 시리즈 설교의 결론으로 "복음과 교회의 연결고리는 삶의 현장"이라며 "예배당 안과 밖의 삶이 일치 안하면 교회가 세상에 뎦여져도 어떻게 교회가 세상을 새롭게 할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아래는 마지막 날 설교요약이다.


    어떻게 요한만 주님과 있었던 더 많은 것을 기억해 냈을까?


   요한사도는 요한복음에 자신이 기록한 일 외에도 예수님이 하신 일이 많아 다 기록할수 없다고 말했다. 과장법같이 들리지만 하나님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다. 자난 2천년동안 부활한 그리스도가 인류의 역사속에 2천년간 이지구상에서 믿은 사람의 삶에서 역사하신 모든 일을 적으면 도대체 얼마나 될까? 요한복음에 기록된 내용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같은 관점으로 기록해 공관복음이러고 부른다. 그에 반해 요한복음 서는 4복음서로 불러지고 공관복음서와 내용이 전혀 다르다. 많은 내용들이 공관복음서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있다. 예를 들면 갈릴리의 욕망의 바다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과거형으로 잊어버렸을때 예수님은 현재형으로 그들 곁에 서 있았다는 내용과 제자들이 뭍에 도착하여 그들은 주님을 배신햇어도 주님은 그들을 위해 생선과 떡을 준비했다는 내용들은 요한복음에만 있다.


   우리가 잘 알듯이 4복음서는 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다. 마태와 마가가 상상으로 적은 것이 아니다. 주님과 함게 3년간  살았던 제자들이 주님과 같이 경험하고 느끼고 본 것을 기록한것이다. 마태와 요한은 같이 3년간 주님과 현장있었으나, 요한이 기억한 것을 마태는 기억하지 못했다. 공관복음은 에수님 승천후 2-30년후에 기록한 것이고, 요한복음은 주님께서 부활 후 60년후에 기록한 것이다. 다른 제자들이 기록하지 못한 내용을 어떻게 요한이 더 오랜 기간후에 기록할수 있었나?


    요한이 삶의 현장을 통해 현재형의 예수님을 만나다


   주님은 십자가에 목박혀 돌아가실때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는 유언의 말씀을 하셨다. 요한은 말귀를 알아듣고 그날로 부터 예수의 육신인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승천한 후 에베소에서 살다 죽었다. 에베소에 가면 마리아가 예수님 승천 뒤 최소한 30년 이상을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만약 요한이 20대 중반부터 마리아를 봉양했다면 50-60대까지 평생을 할머니 봉양을 위해 바친 셈이 된다. 당시 자신과 함께 주님 아래있던 동창생은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뭍사람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동창생은 승승장구하고, 20대 중반부터 요한이 초로의 노인이 되기 까지 할머니 봉양에 전인생 쏯았으니 얼마나 따분하고, 얼마나 피하고 싶었을까? 얼마나 하고 싶은일 하기를 열망했을까? 그러나 요한은 할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삶의 현장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현장은 주님이 주신 현장이고 그가 한 일은 주님이 명령하신 일이다. 주님 위해서 믿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을 지켰을때 자신이 잊고 있던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모습이 보이고 기억나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봉양하는 삶의 현장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에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다. 봉양하는 일을 회피하고 싶을때 욕망의 바다에서 있을때 현재형으로 오신 주님의 모습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따분한 일이 원망스러울때 자신을 위해 떡과 생선을 준비하셨던 주님의 사랑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까지 이런 일을 해야 하나 회의가 생기고 질문이 지신을 사로 잡을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서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 주었던 마리아를 포기하지 않았다.


   젊고 능력있는 요한이 초로의 노인이 되기까지 노파 한명을 봉양하는 일을 보고 세상사람들속에서 한심하다는 등 억측 소문이 많았다. 헛소문에 시달리며 그 옛날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며 거짓소문을 퍼뜨리던 제자들이 생각나고 그것을 복음서에 기록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나는 빛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사랑한다는 것을 자신을 소진시키는것이다. 할머니 마리아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소진함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온몸을 소진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요한복음만 "나는 양의 문이다"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옛날 이스라엘 목장은 우리에 문을 안달고 문의 문턱에 목자는 자신이 누워서 잠을 잔다. 강도 맹수가 양을 공격하려면 자신을 밟고 지나가야한다. 예수님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요한사도는 마리아가 있는 방의 문턱에 앉아 보호하며 양의 문이 된것 같은 느낌으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된것이다. 세족식역시 마태, 마가, 누가등은 누구도 기억할수 없었다. 하지만 요한사도는 자리에 누워있는 노파의 발을 씻어주며 그옛날 주님의 하신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서로사랑하라. 내가 너를 사랑한것처럼"은 새계명이지만 다른 제자들은 기억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라. 약한자는 강한자의 사랑을 받아라"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너의 상황이 어땠든지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 하셨다. 요한이 생을 바쳐 사랑했던 여인은 예수님의 어머니이다. 많은 여인가운데 독생자의 어머니로 선택해서 세운 마리아이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거동은 불편해서 누워있을 망정 정성을 다해 헌신을 마다하지 않는 요한을 사랑했을 것이다. 자기 몸으로 예수를 놓고 살면서 겪은 누구도 알수 없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요한에게 들려주었을 것이다. 사실 요한은 자신만 할머니가 사랑 생각했지만, 할머니에게서 받는 사랑이 매우 컸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의 계명이 생각난 것이다. 그 다음부터 요한은 자신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쓰기 시작했다. 요한은 할머니 봉양이라는 주님의 명령을 통해 주님이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요한이 마리아와 살았던 에베소는 곳곳이 포도원이다. 요한이 할머니를 위해 시장을 보고 생활필수품 구입을 위해 매일 포도원 곁을 걸어다니며 "너희는 가지"라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배당만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자


   요한사도가 요한복음을 쓸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사도가 된것은 주님게서 자신에게 주셨던 삶의 현장을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어 이처럼 소중한 복음과 교화의 연결고리는 요한이 지켰던 삶의 현장을 통해 완결되었다. 복음과 교회를 연결시키는 최후의 가장 중요한 고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이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라는 증거는 예배당안에서 만의 증명이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때 비로서 그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임이 증명된다. 예배당안에서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당 안과 밖의 삶이 일치 안하면 교회가 세상에 뎦여져도 어떻게 교회가 세상을 새롭게하는 생명의 원천이 되나?


   예배를 나갈때 단지 흩어진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런 그림을 그려보자. 주님은 세상은 어둠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다. 예배당을 나갈때 깜깜한 세상속으로 각각 진리의 촛불이 되어 어둠속으로 흩어진다. 그 진리의 불들이 삶의 현장, 자기 가정에 진리의 빛을 발한다. 주일이 되면 다시 기름을 받고 또 다시 진리의 불로 세상을 빛나게 한다. 어찌 그 교회를 통해 세상이 새롭게 되지 않을수 있을까?


   우리는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하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땅끝은 아프리카나 지구 반대편이 아니다. 이곳, 내삶의 현장이 땅끝의 시작이자 종착점이다. 만약 내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살수 있는 사람이면, 지구반대에서도 증인이 될수 있다.


   여러분들은 이곳 미국에 삶의 둥지를 틀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현장이 경제적으로 곤궁할수도 있고, 태산처럼 많은 문제가 산적할수도 있고, 그 삶의 현장에서 고통을 받을수도 있지만 요한처럼 주님이 그 현장을 주심을 믿고 주님때문에 주님 대한 믿음으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증인이 되시길 바란다. 그때 누구도 들을수 없는 성령의 음성이 들릴 것이다. 잃어버린 성령이 임할 것이다. 잃어 버린 주님의 음성을 성령이 듣게 해주시고 우리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욕망의 바다인 뉴욕을  새롭게 하는 이시대의 진정한 진리의 등대로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이다.


   (2005. 10. 19.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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