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W.Tozer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만물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ToBeIsToChange 2006. 1. 17. 16:16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만물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A. W. 토져

 

God's Eternal Purpose : Christ, Center of All Things

 

 

 

 

"그들이 이 말을 하자,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눅 24:36)

 

많은 이들의 의견과는 반대로, 기독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윤리적 체계"가 되고자 한 적이 없다. 우리 주님은 새로운 종교 체계를 세우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내가 감히 말하건대,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되기 위하여 오셨다. 주님은 영원한 목적을 가지고 오셨다. 주님은 만물의 중심이 되고자 오셨다.

 

예수님은 땅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이 되기 위하여 성육신한 인격 안에서 오셨다. 그분은 단순히 다른 이들에게 치유나 축복하는 권능을 위임하기 위하여 오시지 않았다.  주님은 축복이 되기 위하여 오셨다. 왜냐하면 모든 축복과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은 그 분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분은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접촉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제시하신다. 이것은 나만의 사적(私的)인 해석이 아니다.  메시아-구주로 말미암은 구원의 기초적인 가르침으로서, 성경 전체에 걸쳐서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적으로 복잡한 세상에 오셨다. 우리는 그것을 종교적인 정글에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주님이 태어나신 나라 안에서 백성들은 숨막히고 혼란스러운 다양한 의무, 예전(禮典), 의식(儀式)의  짐을 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안에서 종교는 사람이 만든 규칙들로 무성한 어두운 정글이었다.  

 

모든 이에게 빛을 비추는 참 빛이 그 어둠 안으로 왔다. 그분께서 너무나 밝게 빛을 비추셔서, 어둠을 쫓아버리셨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가르치실 수 있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 때가 차매 그분은 하나님의 구원, 곧 인간의 잘못된 모든 것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치유가 되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우리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무질서와 우리의 실패한 치유책으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오셨다.

 

종교는 인간에게 부과되었던 것 중에서 가장 무거운 짐 중에 하나이다. 사람들은 줄곧 종교를 일종의 치료제로 사용해왔다. 자신들의 도덕적 영적 무질서를 알게 되면, 사람들은 스스로의 치료로 더 좋아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종교를 복용한다.

 

 

인간은 무엇이든지 다 시도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회복하고 공로를 얻기 위하여 시도해보지 않은 자기 치료나 혹은 인간의 치료제가 없을 정도로 무엇이든지 다 시도했다. 인도에는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신성한 물에 담그면 죄악의 짐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소망하며 마치 자벌레와 같이 갠지스 강 쪽으로 엎드려서 기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식과 단수, 기타 여러 형태의 자기 부인(否認)으로 죄책감을 처리하고자 애쓰고 있다. 사람들은 마모직 셔츠(역자주: 고행자들이 입는 셔츠)를 입거나, 못 위를 걷거나, 뜨거운 숯 위를 달리며 자신을 괴롭힌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죄의 본성을 보상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공로를 얻기 위한 소망으로 동굴에 은거(隱居)하거나, 수도원에 살면서 사회를 피한다.

 

심지어 이 시대에 이 나라에서조차도 스스로 치료제를 복용하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것을 치료하시는 치료자께서 이미 오셨다는 사실을 모른다.

 

온 생애 동안 메시아를 기다렸던 하나님의 사람 시므온은 치료자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전 뜰에서 요셉과 마리아와 아이 예수를 보자, 시므온은 예수를 팔에 안아 올리며 외쳤다(눅 2:29,30).

 

주님, 이제는 주의 말씀대로

종을 평안히 떠나도록 허락하시나이다.

제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온 백성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인들을 밝히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되풀이 말하지만, 기독교계가 제시하는 이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으로 충분하다! 사람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이 땅에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좋은 소식이거나 나쁜 소식이 된다. 구주를 만나고 친밀히 인격적으로 그분을 아는 모든 이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다른 어떤 길로 하늘에 도달하기를 소망하는 자에게는 나쁜 소식이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부활하신 날 저녁에 열 한 명의 남은 제자들과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에게 하셨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과 동행했던 두 명의 제자는 예루살렘의 제자들 무리에게 돌아와 기쁜 계시를 알렸다. 두 명의 제자가 그들의 입을 열기 전에 예루살렘에 있던 이들이 자진하여 그들의 기쁜 소식을 알렸다. "주님께서 과연 일어나셨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눅 24:34).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체험을 나눌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눅 24:36).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시다

 

그것은 천사들의 아름다운 해설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화평과 사람들을 향하신 선한 뜻이로다"(눅 2:14). 천사들이 그와 같이 선언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오신 분이 예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화평이시다. 그분으로 인해 천사들은 "땅 위에서는 화평"이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성경의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직접 그리고 인격적으로 건강을 나누어주시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중심에 계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중심을 취하실 수 있었다. 그분은 영이시고, 사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지고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시며 모든 것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중심에 계실 수 있다. 그분은 바퀴의 축이시다. 고대에 흔히 사용한 예증을 빌리면, 그분은 둘레의 모든 것이 회전하는 바퀴의 축이시다. 수세기 전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축이시고 피조된 모든 것은 축의 테 위에 있다'고 했다. 이 설명은 고대의 교부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동일하게 떨어져 있으며 예수님께 동일하게 가까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축으로서의 고유한 곳에 계시다면 우리는 모두 그분으로부터 동일하게 가까이 있거나 동일하게 떨어져 있다.

 

예수님은 한 가운데 계신다.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삶의 어느 곳에 있든지 그분께 나아가기가 쉽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요, 놀라운 기쁜 소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리적으로 중심에 계신다. 그러므로 누구도 위치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유리한 곳에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역사적인 십자군 성전 때,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시던 동안 계셨던 바로 그곳으로, 특별히 그분의 시체가 묻힌 무덤으로 순례를 감으로 공로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늙은 맨발의 수행자 베드로가 전 유럽을 격양된 상태로 몰아 놓아 십자군을 진군시켰을 때, 그는 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신 무덤을 해방하는데 성공했다. 십자군은 그 빈 무덤을 이슬람교도로부터 되찾기만 한다면 만사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누우신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 끌리고 있다.

 

 

그분은 거기 계시지 않는다!

 

우리는 영적으로 왜 그렇게 우둔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는가?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를 경배할 때가 오느니라... 참 경배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신에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경배할지니라"(요 4:21-24).

 

왜 십자군이 이 점을 생각하지 않았는지 의아하다. 왜 온갖 아사(餓死), 고생, 피흘림이 있어야 했는가? 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예수님께서 죽으신 곳에 도달하고자 지루하고 고된 여행을 해야 했는가? 이 세상의 어느 곳도 지리적 이점이 없다. 우리 중 누구도 예루살렘에 삶으로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다. 우리 중 누구도 유다 혹은 갈릴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산다는 이유로 영적으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리적으로 한 중심에 계신다. 모든 장소는 다른 모든 장소와 똑같이 그분께 가까이 있다! 그리고 모든 장소는 똑같이 떨어져 있다. 우리와 우리 구주이신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리적인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성지를 방문하기만 하면 더 나은 말씀 선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설교자들이 성지 방문으로 엄청난 돈을 낭비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과 나자렛과 게버나움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돌아올 때, 그들은 단지 몇 개의 이야기 거리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실제적으로 그들은 도덕적으로 나아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청중들은 도덕적으로 나아지지 않았다. 모두 이 사실을 믿자: 예수님은 축(軸)이시고 지리적으로 모두는 그분 주위에 있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지리적으로 중심에 계실 뿐 아니라, 또한 시간의 중심에 계신다고 판단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팔레스타인에 살았더라면 하며 간절히 원한다. 주일 학교에서 우리는 그러한 취지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이 땅에 계실 때,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어린양처럼 주님의 우리로 부르셨는가

그 달콤한 엤날 이야기를 읽던 때를 생각하니

그 때 그분과 함께 있고 싶다.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많은 눈물로 얼굴을 적시곤 했다. 그러나 당신은 예수님께서 유다의 산들과 갈릴리 해변가를 거니시던 때, 그분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십 일 후에도 그 삶이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는가? 승천하신 후 십일 후에 예수님은은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그분과 함께 있는 동안 부분적으로 이해했던 제자들만 섬광이 번쩍이듯이 갑자기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었다.

 

 

근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소서!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시던 때에 살고 싶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께서 계시던 때에는 위선자와 바리새인과 대적자들이 있었다. 믿지 않는 자들과 살인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천 년 전보다 나은 것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옛날의 좋은 때라고 여기며 향수(鄕愁)로 뒤돌아보는 사람들은 그러한 근시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인종의 중심에 계신다고 생각하라. 그분은 한 민족을 다른 민족보다 편애하지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분은 유대 인종만의 아들이 아니다. 그분은 어떤 피부색이든, 어떤 언어로 말하든, 모든 인종의 아들이시다. 그분께서 죽을 육체로 육신이 되셨을 때, 단지 유대인의 몸 안에서 성육신 되신 것이 아니라, 온 인종에 적합한 몸 안에서 성육신 되신 것이었다.

 

당신은 티벳이나 몽고에 갈 수 있다. 당신은 남 아메리카 인디안, 이란의 이슬람 교도, 서부 아프리카의 부족민, 글래스고우의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있다. 믿음이 있고 기꺼이 따라가고자 한다면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의 교제 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들은 모두 테 위에 동일하게 떨어져 있으며, 동일하게 가까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모든 문화 수준의 중심에 계신다. 연합 선교사들은 어떤 나라로 들어가서 먼저 사람을 교육한 후에 그리스도를 선포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정도로 그들은 어리석지 않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박식한 미국인 또는 영국인 가까이 계시듯이 교육을 못 받은 섬에 사는 사람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원시적이고 게으른 백성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라. 성령께서 그들에게 지각을 주실 때까지 참으라. 그들의 마음이 깨어날 것이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비추실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게 된 자들은 변화될 것이다. 그것은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며, 오늘날 세계에서 되풀이 증명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인도네시아의 지방에서는 식인 풍습을 겨우 한 세대 벗어난 소위 석기 시대 사람들이 대학 학위를 가진 자 만큼 빨리 거듭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담쟁이 넝쿨이 덮인 홀 가까이 계신 것같이 정글 가까이 계신다.

 

 

우리의 연수(年數)의 중심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 모두의 인생의 연수의 중심에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는 8 살 때 가까이 계신 것 같이 80 살 때에도 가까이 계신다. 5 살 때에 가까이 계신 것같이 50 살 때에도 가까이 계신다. 물론 사람들은 우리가 늙을수록 하나님을 향해 도달하기가 어려우며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려는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로 나오는 우리의 능력 - 하나님과의 거리 - 은 우리가 젊은이일 때나 90세 일 때나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우리 주님은 언제든지 그분의 화평의 축복을 하실 수 있도록 모든 경험의 중심에 계신다. 경험은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험을 갖지 못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우리의 세상에서 단지 작은 낯선 자일뿐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우는 것이 주의를 끄는 것임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빨리 배운다.

 

100 살까지 사는 사람은 참으로 어떤 경험들을 가졌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고지(高地)의 주둔지에서만 일생을 보내고 거의 외부로 나오지 않는다면, 아마도 좁은 분야의 경험을 가질 것이다. 거꾸로, 잘 교육받은 교제권이 넓은 세계 여행가는 너무나 방대한 경험을 가져서, 그 사람의 뇌가 장차 기억하고 참조하기 위하여 그렇게 많은 것들을 어떻게 정리 보관할 수 있을지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묻건대, 과연 누가 더 예수님께 가까운가? 경험이 없는 아이는 넓은 경험을 가진 사람보다 더 유리한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삶의 경험의 한 복판에 서 계신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든, 누구든지 그분께 도달할 수 있다. 18세기 위대한 뉴잉글랜드 설교자 죠나단 에드워드는 겨우 다섯 살 때 회심했다. 그는 기록하기를 "나는 타락한 적이 없이 계속해서 똑바로 갔다"라고 했다.          

 

소년 사무엘과 늙은 제사장 엘리를 보라. 아마도 사무엘은 12살이었을 것이고, 엘리는 98세였다. 그 소년이 어떤 경험을 가졌겠는가? 물론 약간의 경험은 있었겠지만 엘리의 경험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엘리는 온갖 인간의 가능성을 다 경험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거리는 경험이 없는 어린 사무엘과 수 십 년을 걸쳐 인생이 결국 무엇인가를 발견한 엘리 사이에 차이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머리 윗편에 걸린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 예수라"고 쓴 죄명은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의 세 언어로 되어 있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안배하신 이 죄명으로 온 세상을 끌어 들이셨다고 지적했다. 히브리어는 종교를 대표하고, 그리스어는 철학을, 라틴어는 로마의 군사적 무용(武勇)을 대표한다. 인간 경험의 모든 가능성은 세상적 규모로 이 세 가지 언어 안에 싸여 있다.

 

 

누구도 더 가까이 있지 않다

 

"그가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씀드리되, 랍비시여, 랍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교사이신 줄 저희가 아나이다"(요 3:2)라고 말했던 히브리인 교사인 니고데모가 하나님의 아들과 가까이 있는 것만큼 로마 병사도 하나님의 아들과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이 아레오파구스에서 연설을 한 후 믿었던 디오니시우스와 다마리스와 그들과 함께 한 아데네 그리스인 지식인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가까이 있는 것과 같다.

 

그 때의 세상과 같이, 우리는 여전히 종교, 문화-철학, 무력-정치를 갖는다. 이러한 계층 안에는 어느 곳이든지 모든 것이 타락한 것처럼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 인간 세상의 중심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따라서 제사장의 성소에서 그분께 접근하는 것이 쉬은 것만큼 철학자의 상아탑에서 그분께 접근하는 것도 쉽다. 자신의 저서(著書)에 에워싸여 있는 사상가가 그분께 접근하는 것이 쉬운 것만큼 제복 차림의 병사나 정치적 지도자가 그분께 도달하는 것도 쉽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한 가운데 서 계시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유리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나를 위협하거나 그분으로부터 내쫓을 수 없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아무도 내게 "당신은 몰라요"라고 말하면서 나를 비웃을 수 없다.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며 웃으면, 나는 웃으며 응답하면서 "모르는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요. 왜냐하면 나는 알기 때문이요!" 라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어떤 사람과 같이 지금 있는 곳에서 신속하게 예수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아인스타인은 그의 위대한 정신으로, 원했다면 손을 뻗어서 메시아를 만질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읽거나 쓰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에 관한 한, 아인스타인이나 서명으로 X 자를 하는 자나 모두 동일한 범주 안에 있다. 이들 모두는 테 위에서 동일하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유리하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없다. 

 

당신은 "그렇다면 왜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도달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을 것이다. 그 이유는 변명할 수 없는 완고함 때문이다. 불신앙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진실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고백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린다. 만약 성령 하나님께서 당신의 필요를 깨닫도록 도우셨다면, 좋은 소식을 알려주겠다. 당신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갈 수 있다. 당신은 그분을 만질 수 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지, 삶에서 당신의 위치가 어떠하든지, 당신을 돕기 위하여 흘러 넘치는 그분의 권능을 느낄 수 있다.

 

예수님은 학식있는 사람만 구원하고자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분은 백인만을 구원하러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피부색이 어떠하든지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분은 아이들과 젊은이들만 구원하러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모든 연령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한 가운데 - 여느 사람과도 같이 당신 가까이 - 계신다. 예수님은 자기의 화평으로 당신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신다. 당신과 예수님에 관하여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당신이 있는 그 곳에서 그분께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