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생활은 쉽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좀 더 깊어지고 차원이 높아질수록 그 길에는 더 많은 장애와 수없는 적들의 대항과 싸움을 예상해야 한다. 이것은 깊은 신앙생활을 한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아는 피할 수 없는 진리이므로 그 어려움과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비결을 배워야 한다.
사단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지극히 미워하는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의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더욱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갈 뿐 아니라 그 권속의 하나라는 이유다. 사단의 질투와 증오는 조금도 변함없이 불같이 타고 있다. 그를 볼 때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며 이것은 바로 사단의 극렬한 증오의 원인이다. 또한 진정한 그리스도인 죄의 노예살이에서 풀려나온 사람이기 때문에 사단은 그를 볼 때 분노를 금치 못한다. 또 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사단이 자기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데 늘 방해가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마다하고 하나님 보좌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단이 볼 때에는 어느쪽에서 자기에게 위험이 올지 모르게 된다. 또 하나의 엘리야가 나올지 아는가? 다니엘이나 루터나 혹은 윌리암 부스같은 사람이 또 나올지 어떻게 아는가? 에드워즈나 피니같은 그리스도인이 또 태어나 세상 구석 구석에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며 기도하여 영혼을 자유롭게 할지도 모른다. 사단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큰 위기이므로 할 수만 있으면 서둘러서 자기의 적을 막으려고 애쓰는 것도 당연하다.
갓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우선 사단의 첫째 공격 목표가 된다. 군인을 무찌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장성한 사나이가 되기 전에 처치해버리는 것이다. 모세가 위대한 민족을 이루기 전 어릴 적에 없애면 되는 것이다. 신앙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일찌감치 없애야만 나중에 골칫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의 육체적인 공격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전장에서 영웅적인 죽음을 한 병사는 군대로서는 전력의 손실에는 별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국가의 긍지와 자랑이 된다. 그러나 싸움터에서 후퇴하여 슬슬 피하는 군인은 가족의 창피일 뿐 아니라 국가의 불명예요, 패배의 앞장이다. 마찬가지로 믿음 가운데 죽은 그리스도인은 사단에게는 승리가 아니며 오히려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촉진시키는 산 증거가 된다. 그렇지만 소위 믿는다는 사람이 믿음의 싸움을 회피하거나 항상 비참한 생활로 비극 가운데 산다면 이것은 적에게 미소를 주는 일이며 결국은 온 교회에 눈물을 가져다 주는 씨앗이 되고 만다.
사단의 주요 무기는 우리를 육체적으로 병들게 하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며 (물론 때로는 자기의 흉측한 계획에 따라 육신적 고통과 죽음을 야기시키기도 하지만) 신앙적 싸움에서 도망가는 비겁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또 이일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의미에서는 사단을 별로 해롭게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전쟁이 험악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비록 도망가지는 않으나 자기 의식에 싸여 있으며 병든 새끼 독수리처럼 창공을 날지 못하며 순례의 길이 힘이 들어 길바닥 나무 그늘에 주저앉아 향기도 없는 시든 꽃을 보며 한숨을 짓는 사람이다.
사단은 이러한 일들을 벌써부터 행하고 있다. 부패하는 어느 교회를 보이면서 거짓 진리와 기만으로 깊은 실망에 빠지게 하며, 양심을 흐리게도 하고 그들의 확신을 모호하게 하여 아무런 활력도 없이 다만 교회라는 종교적 기관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내는 통계상의 사람들로 만들어 놓고 있다. 이러한 일부 목회자는 매주일 예배당을 채우는 사람들에게 소위 신령한 옛 전시품을 보여주는 박물관장처럼 행하기도 한다.
사단이 어린 그리스도인을 대적할찐대 그리스도의 보다 높은 삶을 향해 애쓰는 사람들에겐 더욱 심하게 훼방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이 성령충만의 생활이 결코 평안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실은 정반대인지도 모른다.
어느 면으로 보면 강도가 몰려있는 숲길을 지나가는 것이며, 마귀와의 투쟁이 있는 통로다. 거기엔 항상 싸움이 있으며 또는 육과 영의 충돌로 인한 갈등과 실망의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승리의 그리스도를 인도자로 모실 때 넉넉히 승리할 수 있지만 내가 강조하고픈 것은 우리가 만일 그러한 투쟁과 갈등을 피해 도망을 가거나 숨어버린다면 그에게는 많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붙어있는 비참하고도 무미 건조한 신앙생활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힘을 약화시키며, 성장을 막고 결국 사단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일이다.
타협은 어려움을 슬쩍 넘어가게 할 수 있다. 싸움을 포기한 그리스도인은 사단이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싸움을 포기한 자의 결과는 침체와 공포와 실망일 뿐이다. 그리스도인 생활이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지만 그러한 영원의 자녀가 된 우리가 안일한 것을 위해 자신을 바칠 수는 없다.
'A.W.Toz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사람인지 분별하는 방법 (0) | 2006.01.17 |
---|---|
이것이 성공이다 (0) | 2006.01.16 |
믿음 그 재인식의 필요성 (0) | 2006.01.16 |
그리스도의 권위 (0) | 2006.01.16 |
Lord & Savior (0) | 2006.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