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욱 목사의 <153> 비판적 읽기1 |
말씀이라는 구호만 외치면 모든 것이 통하는 메시지의 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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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의의: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전병욱 목사의 저서, 그리고 강연 등을 비판적으로 읽어나가는 작업을 한 이후 여러 가지 반응들을 접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반응들 가운데 한 가지 마음에 매우 걸리는 종류의 반응이 있습니다. 가령 이러한 것들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왜 그런 식으로 비판하는가? 전병욱 목사에게도 장점이 있는데, 그 장점을 좀더 주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뉴스앤조이>는 비판적인 기사보다는 좀더 밝고 건강하고 은혜가 되는 이야기를 해라” 등입니다. 그러면서 모순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런 반응들이 저에 대하여 비판하고 꾸짖고 충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하면서 저에게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비판이란 우리가 진리를 규명하고 그에 대한 명확한 정리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저는 저에 대한 비판 자체를 논박하지 않았습니다. 그 비판의 내용이 담고 있는 것을 문제삼았을 뿐입니다. “비판을 포기하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해라”, 이것은 결국 무지한 맹목적 신앙에 기독교인들을 물들게 하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신은 무제한적인 비판의 권리를 누리면서 상대에게는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갇힌 자를 풀어내고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 풀어냄과 눈뜸의 과정에는 우리의 영혼이 무지와 맹목에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허설(虛說)에 속지말고, 진실에 마음을 두려면 우리는 보다 총명해져야 합니다. 얼핏 그럴싸한 것 안에 들어있는 진면목에 영의 눈이 밝게 떠져야 올바른 믿음을 자라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스스로를 속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박제된 교리적 해석에 매몰되어, 살아 있는 생생한 믿음의 세계와는 인연이 없는 신앙을 신앙인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전병욱 목사의 설교와 강연 등을 우리가 문제삼게 된 것은 크게 보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신학과 설교, 강연에는 오늘날 역사와 현실의 소수자로 밀려나 있는 가난하며 고단하고 힘겨운 사람들을 상당히 무시하고 깔보면서 현실의 승자를 추켜세우는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말씀의 섬세하고도 치밀한 해석보다는 무의미한 동어 반복적인 세뇌가 그의 메시지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두 번째 대목은 지금까지 집중해서 다루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첫 번째의 문제가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그의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우선적으로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대목, 즉 말씀의 속살을 깊이 응시하고 성찰하면서 이를 해석하는 일보다는 말씀을 그저 '말씀'이라는 구호로 사용하면서 신앙의 내용을 차원있게 채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신학이 생각 이상으로 피상적인데 있습니다. 말씀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 구조와 그 의미에 대하여 치열하게 파고들지 않고 있다는 것, 그래서 '말씀 중심'이라는 선언은 하고 있으나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계속 오리무중이 되어버리는,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사실상 한국교회에 있어서 중대한 현실적 현안이기도 합니다. 말씀이라는 구호만 외치면 모든 것이 다 통하는 식이 되는 메시지의 허상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수준을 유치하게 만들고 있는 원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의 메시지는 하나님나라의 의와 그 뜻에 충성하여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기보다는, 교회에 충성하는 자들로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개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책임져야 하는 역할을 우습게 여기고,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요소가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 살펴볼 <153>은 바로 그러한 각도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동어 반복적 메시지의 피상성 만일 누군가가 “말씀은 힘이 있어서 우리의 골수를 쪼개고 그 영혼을 변화시킨다”는 메시지를 했다고 해보지요. 그리고 “따라서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야 우리가 온전히 새로워진다”라고 말했다고 하면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이런 방식의 이야기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거의 정형화된 이야기이다시피 하고, 그래서 그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아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말씀의 정체, 그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과 그 해석이 이어지지 못하면, 우리는 단지 “말씀”이라는 구호에 자동적으로 만세삼창을 하는 식이 되고 맙니다. 그 말씀이 어찌해서 우리의 영혼을 쪼개는가, 그 말씀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그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어주고 있는가, 이러한 것들을 증언해내는 것이 바로 목회자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다룬 전병욱 목사의 <153>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라, 복음을 들고 현장에 나가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이런 식의 논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그게 왜 문제냐, 라고 의문을 제기할 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이러한 논리와 주장이 틀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 증거해야 하며, 복음을 가지고 현장에 나가서 증언해야 할 사명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모든 준거라는 점에서 그를 바라보는 일은 마땅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 주장이 피상적으로 그치고, 구체적인 내용을 깊이 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논리는 어느새 구호처럼 되어 생명력을 잃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기독교 신앙의 수준과 깊이가 이렇게 되면 그 장래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실존과 관련지어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며, 그로써 역사에서 확고한 믿음과 비전을 가진 새로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성숙한 주체세력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왜 그러한가 볼까요? 일일이 다 들추어 말할 수는 없고 한가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령 이런 식입니다. 그의 <153> 가운데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예수님을 쳐다보는 운동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삽니다....십자가를 바라보면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바라보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쳐다봅시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듣게 되는 설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될 것이 없을 듯 합니다. 그렇지만, 그 설교에는 예수의 삶, 그의 십자가에 대한 해설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예수를 보라, 십자가를 보라, 그러면 산다” 식입니다. 이것은 신앙인, 비신앙인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의 무엇을 봐야 사는지, 그 십자가를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하도록 돕지 못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서 신앙인들이 기독교적 용어가 나오면 그저 '아멘' 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오늘날 새로운 믿음의 차원을 열고 싶은 신앙인들은 이러한 수준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내용이 담겨져 있지 않은 구호성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일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의 삶, 그 현장에 오신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는 책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그 나사렛 예수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삶의 의미를 캐어들어 가고 그것이 나와 어떤 실존적 관련을 맺을 것인가를 깨닫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전병욱 목사는 그의 책 중반 이후부터 예수님의 삶에 대한 자신 나름의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대목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삶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삶을 파악하는 면모가 대단히 피상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첫 기적을 일으키신 포도주 사건에 대한 전병욱 목사의 이해를 보기로 하지요. “본문을 보면 포도주를 만드는 문제가 중요한 문제입니까, 사소한 문제입니까? 죽고 살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아주 사소한 문제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삶의 이러한 사소한 문제까지도 구할 때 들어주십시다. 우리 삶의 작은 부분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게 되길 주님께서도 바라고 계십니다.” 결혼식은 그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라 그 마을 모두의 큰 잔치였던 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사회적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행과 그 모친 마리아도 이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칫 이 잔치의 흥겨운 분위기가 중도에서 파장으로 끝날 상황이 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잔치의 주관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잔치 전체의 흐름을 보다 풍요하게 유지시켜 나가는 일과 직결되어 있는 사태였습니다. 포도주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불찰로 그 잔치는 애써 잘 차려놓고도 자칫 막판에 가서 죽을 쑤게 생긴 것입니다. 물론 죽고 살 일은 아니었지만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남들에게는 사소하게 보일 지 몰라도 당사자에게는 이 상황에서 결정적인 일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각자의 인생에서 그 인생의 흥겨움과 기쁨을 더 이상 지속시킬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 무엇인가가 사라지고 있다는 불안에 휩싸여 힘겨워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개입은 사태를 완전히 역전시킵니다. 정작 반드시 공급되어야 할 것이 없어서 파장될 뻔했던 인생과 역사를 바로 잡아주시는 것입니다. 이 기적 이야기는 사소한 것까지도 챙겨주시는 이야기로 요한복음에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최초의 기적이 무엇인지를 소개하는 요한복음 저자의 의도는 이 사건을 통해서 가장 인상깊게 예수님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은 이 사건을 깊이 응시하면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사소한 필요까지 채우는 예수님을 말하고 싶어 기록한 사건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인생이란 누구의 것도 모두 잔치의 기쁨으로 가득 채워진 축제의 현장이 되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의 삶을 습격하는 불행과 역경, 그리고 목마름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때 아무도 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할 때, 과연 그것이 답일 수 있을까 싶은 방식으로 우리 인생의 돌파구를 여시는 존재, 그것이 나사렛 예수에 대한 요한복음의 증언입니다. 오늘날에도, 인생이 파산의 지경에 몰리고 역사가 궁지에 처하며 축제의 함성이 울려야 하는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탄식이 뒤덮고 있는 상황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그러한 현장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것이 우리가 전하고 일깨워야 할 말씀의 진정한 정체입니다. 어디 우리가 사소한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겠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이렇게 당사자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 그 순간에 누군가의 진정한 조력이 간절한 상황,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맺게 되는 연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정황에 처해 있는 우리의 고단한 이웃들에게 찾아가서 그들과 삶의 사연을 나누고, 그 사연의 한복판에 바로 이 예수님을 전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힘이 폭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병욱 목사가 운동권들의 논리라면서 우습게 여기고 말한 '고난받는 민중'들의 삶을 진정한 축제의 기쁨으로 채워나가는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고난의 위기에 처해 잔치의 꿈조차 꾸지 못하고 비틀거린 사람들에게 바로 이 축제의 희망을 주셨다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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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목사의 <153> 비판적 읽기2 |
왜곡된 역사의식이 야기시키는 설교의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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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가, 이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을 이해하는 일에
매우 근본 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바르지 못한 권세의 질서를 뒤바꾸어 하나님
나라의 의와 선을 이루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언자 전통은 모두 이 역사의 불의에 대한 질타와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의한 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 가운데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이 한나의 기도 전통과 깊은 맥락을 가지고 있는 마리아의 기도는 어떻게 보면 매우 과격할 정도의 역사의 혁명적 변화를 담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오늘날 누가 이러한 기도를 공개적으로 한다면 아마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선동하는 자라고까지 낙인찍힐 만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나 마리아 모두 당대의 힘겨운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인간 역사에 바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란 사람들 모두의 간구를 대변하고 있는 존재였고 그 기도의 실체가 바로 사무엘과 나사렛 예수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역사관은 힘이 있다고 인간을 억누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자들이 강자가 되는 세상에 명확하게 반기(反旗)를 듭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질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제각기 자신의 권력을 믿고, 네 안에서 살인을 서슴치 않았다. 성읍아, 네 안에 살고 있는 그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신여기며, 네 한복판에서 나그네를 학대하고, 네 안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구박하였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이, 권세를 쥔 지도자들의 압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 하나님은 실로 자신의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억압하는 자들에 대하여 진노하셨고, 이들이 징벌을 받아 역사의 주도세력이 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인들은 역사의 강자로 군림하는 자들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들이 강하고 지체 높은 자들로 숭배되는 현실을 타파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 온유와 겸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멸시와 짓밟음, 그리고 교만과 독선, 지배욕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에, 전병욱 목사의 역사이해는 매우 피상적이고 그 근본에 대한 이해가 바로 서 있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가 성공주의를 부추기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현실에서 승자나 강자의 논리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가당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예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약자나 강자 모두에게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이 곧 약자의 실존적인 죄와 강자의 불의한 권세를 옹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죄의 개념에는 약자로 존재하는 인간의 실존적인 죄와 더불어 현실에 군림하는 불의한 권세의 존재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매우 분명하게 선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약자의 죄에 대해서는 그토록 유난하게도 강조하는 기독교가 강자들의 불의한 권세에는 침묵하고 마는 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최근의 MBC 사태를 두고도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언젠가도 언급했지만 한국교회는 사회적 불의에 대한 예언자적 각성을 촉구하는 일에는 이상하게도 자유주의신학이요, 해방신학이네, 민중신학이네 하면서 적대적일 정도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성서가 우리에게 일깨우려는 역사의식을 바로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병욱 목사의 역사의식 빈곤과 왜곡은 그의 성서 읽기가 피상적인데서 오는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의 역사관이 딛고 있는 기반이 기본적으로 서구(西歐)의 정의(正義)와 강자의 승리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로 매우 잘못된 역사이해이자, 우리 자신의 역사를 폄하하고 불의한 강자의 승리를 찬양하는 쪽으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 우리 역사 속에서도 이승만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권력자들의 불의를 질타하고 꾸짖는 권위있는 영적 지도자의 모습보다는, 이들에게 아부하고 찬미하는 종교인들이 득세하고 교회 지도자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현실은 다 바로 이러한 역사관의 소산이라고 하겠습니다. 역사의 왜곡, 그 사례들 전병욱 목사는 말로는 “역사를 믿음으로 뒤집어 바로 세워야 한다”고 했는데, 그의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놀라울 정도로 깊이가 얕고, 편견과 왜곡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믿음의 걸림돌이 <피상적인 지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말이야말로 자신에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가 뒤집고자 하는 역사 자체에 대한 이해가 바로 서 있지 못한다면, 그가 바로 세우려는 것이 도리어 거꾸로 세우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는 사뭇 위험한 대목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1)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이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현실이 왜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두가 투사들이었습니다. 아파치라든지 모히칸족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 사람들이 굉장히 훌륭한 전사(戰士)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용맹한 투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파치나 모히칸족이 언제부터 나약해지기 시작한 줄 아십니까? 바로 인디언 보호구역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호받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오합지졸로 전락했습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듣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있다면 격노할 것입니다. 이들을 보호구역에 강제적으로 몰아넣은 자들, 즉 이들의 땅을 빼앗고 살육하고 종족말살 정책을 편 백인들의 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마치 이들이 자발적으로 보호구역에 들어가서, 편히 살기 위해 정부보조금을 받아먹고 사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나약해지고 말았다는 투입니다. 실로 경악할 지경입니다. 이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해서 얼마나 간고한 투쟁을 했으며, 백인들의 우세한 화력에 결국 피눈물을 뿌리면서 무릎을 꿇고, 보호구역이라고 하는 작은 땅에 집단 수용되어 가는 과정이 얼마나 처참한 역사를 남겼는가는 미국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해보면 금새 알게 되는 일입니다. 그가 “아파치라든가 모히칸족의 기록들을 살펴보면”이라면서 마치 직접 이들의 역사를 확인한 듯 말하고 있는데, 어찌해서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보지 못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결코 오합지졸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본래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미연방정부를 상대로 하여 투쟁하고 있습니다. 속임수로 빼앗아 간 땅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제기하고 있으며, 2백년도 더 되는 연방정부의 문서를 증거로 하여 법정투쟁을 벌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 신자들이라는 백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을 어떻게 무력으로 파괴했고, 이름하여 <보호구역>이라고 하면서 이들의 주거를 제한하는 가운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고 있는지 고발하고 있습니다. 전병욱 목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현실을 두고 다음과 같은 말도 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을 받기 때문에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즐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모아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하면서, 그들은 전혀 일하지 않는 노예민족이 되었습니다. 1,500불에 비전과 민족의식을 다 팔아먹은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이것이 고도의 식민정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미국 주류사회에서 진출하고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보호구역 밖으로 나오면 생존의 기회가 봉쇄되고 맙니다. 보호구역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여력도 미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생존을 위한 길이 막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1,500불에 비전과 민족의식을 다 팔아먹은 것이 아닙니다. 이 길 외에는 트여 있지 않은 무서운 현실이 문제입니다. 백인들의 지배정책에 희생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언급한 것처럼 “고도의 식민정책”이 아니라 적나라한 노예화 정책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이 노예적 식민정책을 집행하는 강자들에게 물어져야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나약함에서 떨쳐 일어서야 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면 먼저 이 보호구역 정책을 하는 백인들을 지탄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잘못된 정책의 책임을 가려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문제의 원인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동지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백인 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바로 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생존을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이들을 노예화한 역사의 죄를 회개하면서 이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함께 힘을 모으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전병욱 목사의 역사관으로는 이러한 현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희생당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조의 결론을 내릴 뿐입니다. (2)영국에 대한 이해 전병욱 목사는 영국이 대단히 의롭고 기독교적인 나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북쪽으로 갔습니다. 러시아쪽으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안드레는 ‘비잔틴 교회의 창시자’라고 일컬어집니다. 동방정교회의 창시자 안드레는 북쪽으로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주후 60년에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당하였습니다. 순교당할 때에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는데, 그의 형이었던 베드로는 십자가형을 당할 때 ‘내가 예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릴 수 없다’고 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지 않았습니까? 이 거꾸로 된 십자가를 베드로의 십자가라고 합니다. 안드레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안데레는 엑스자형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엑스자형 십자가를 가리켜서 ‘앤드류의 십자가’(Andrew's Cross)라고 합니다. 영국 국기를 ‘유니온 잭’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유니온 잭은 보통의 십자가와 안드레의 십자가를 합쳐놓은 모습입니다. 이 유니온 잭은 로마 십자가(정상적인 십자가)와 앤드류의 십자가를 합쳐 놓아서 ‘하나님 앞에서 순교하고 헌신하는 나라가 되겠습니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영국 국기를 바라볼 때마다 안드레의 순교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저 안에 안드레가 있구나. 저 안에 안드레의 복음의 뿌리가 아직까지 남아 있구나.”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도 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원주민인 앵글로색슨족은 원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내려온 야만인이었습니다. 옷도 입지 않고 오랜 세월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들어가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신사의 나라가 되었고,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 이토록 세계사의 흐름과 본질에 무지할 수 있을까 싶으니 마음이 참담해질 지경입니다. 영국이 19세기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이 복음이 들어간 결과라니? 여기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란 지구촌 도처에 영국이 식민지를 세워 그 지역 백성들을 노예로 만든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영광스러운 칭호가 아니라, 인간과 역사에 죄를 지은 증거입니다. 복음을 앞세워 이 지역 민족들의 정신을 세뇌하여 영국인들을 최고의 문명적인 존재처럼 ‘신사’로 떠받들게 하고 사실은 자신들의 이익을 취한 야만적인 제국주의 세력이었다는 것은 세계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유니온 잭 깃발은 그래서 우리에게 일본의 일장기(日章旗)처럼 이 식민지 백성들에게 원성의 대상이었고, 기독교를 앞세워 사실은 침략과 정복을 정당화한 나라의 표본이었습니다. 영국은 기세 좋게 “인도와 세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지만, 이렇게 오만한 발언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꿀 마음도 없었거니와, 바꿀 방법도 없고 결국 영국은 인도와 세익스피어 모두를 거머쥐고 문명국의 행세를 하면서 야만적인 식민통치를 자행하였습니다. 스벤 린퀴비스트라는 사람이 쓴 유럽의 아프리카 인종 학살사를 보면 영국이 유니온 잭 깃발을 앞세워 얼마나 잔혹한 짓을 벌였는지 낱낱이 고발되어 있습니다. 유럽국가들의 깃발을 보면 상당한 수의 깃발에 십자가가 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중세시대 십자군 전통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입니다. 그 십자군이라는 것이 십자가를 앞세워 정복전쟁을 정당화했던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는 유니온 잭 깃발을 보면, 안드레의 순교가 영국의 깃발에 남겨져 있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순교를 현실에서는 헛되게 한 영국의 역사를 직시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에 복음과 순교의 전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역사의 맥락을 주목한다면, 유니온 잭 깃발에 대한 해석이나 해가 지지 않는 나라에 대한 해석도 달라져야 합니다. 영국 기독교 내에 바로 이러한 문제를 놓고 영국 제국주의에 치열하게 저항했던 신도들이 있었다는 점을 안다면, 전병욱 목사식의 영국 이해는 얼마나 피상적이고 왜곡된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나치스가 내세운 상징도 각이 꺾여진 철 십자가라는 점을 알고 있다면, 자신들의 국가적 야망을 위해서 기독교의 복음과 상징을 이용한 악한 역사에 대해서 우리는 보다 준엄해질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서 진정한 기독교의 진실을 회복하는 역사를 위해 헌신하는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전쟁에 대한 이해 그는 전쟁과 관련해서도 이러한 역사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0세기초는 대대적인 배교의 시대였습니다. 자유주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외치는 니체의 영향력이 남아 있던 시대였습니다. 신앙을 이성으로 대치하려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깨어 있는 많은 성도들이 기도하면서 <하나님, 이제 영광을 떠나보내십니까? 이기봇의 하나님이십니까?> 하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망스러운 상황도 잠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1차 대전을 터트려 버리십니다. 그래서 유럽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인간들이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 이성의 종말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란 것이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그때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크나큰 부흥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구체적인 이끄심의 내용입니다.” 그는 전쟁이 터진 것으로 말미암아 정말스러운 상황도 잠깐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하나님을 모르는 절망스러운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경험을 통해서 이성에 대한 신뢰를 청산하고 인류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차 대전은 이른바 자유주의 시대의 결과이자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소산이 아닙니다. 또한 니체가 하나님은 죽었다고 했던 것은 당대 유럽의 기독교 문명이 처한 위선에 대한 고발이었지 하나님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니체 만큼 신의 존재에 대하여 처절하게 고민한 철학자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만 유럽 기독교의 허위와 위선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었다”는 구호만 알고 니체는 신을 부정했다는 식의 피상적인 니체 이해는 니체의 책을 읽게 되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전병욱 목사가 니체의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니체의 경고에 좀더 세심하게 귀를 기울였다면 유럽 기독교는 자신의 생명력을 복원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결과 유럽 기독교는 이후 문명적 지도력을 잃어가게 되었고, 제국주의 침략에 정신적 도구로 이용당하는 초라한 처지가 되고 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격하고 있는 유럽 교회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이렇게 계속해서 실망시키고 죄를 키워나가면, 누군가가 “한국교회에서 하나님은 죽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 되고 말지도 모릅니다. 한국교회는 결국 이런 식으로 가다가 텅텅 비어가게 될 지도 모릅니다. 다시 1차 대전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봅시다. 이 전쟁은 유럽 열강들이 서로 식민지를 자기가 독차지하겠다고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발칸반도의 민족감정을 건드린 것이 단서가 되어 폭발한 것입니다. 이성이 과잉상태에 이르고 이에 대한 신뢰가 넘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서구 강대국들이 욕심과 야망을 멈추지 못한 채 서로 총칼을 겨누면서 일어난 유럽의 내전(內戰)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병욱 목사는 이를 두고 하나님이 신앙을 이성으로 대치하려는 절망스러운 상태를 끝내기 위해 다행스럽게도 이 전쟁을 터트리셔서, 신앙에 대한 신뢰를 버리게 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하신 의도가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며 특히 유럽의 강대국들이자, 이들의 명백한 죄입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다치며 문명이 파괴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은 무한히 슬퍼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살육하는 이 피의 강 앞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깊이 후회하고 통곡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어찌 전쟁의 하나님이십니까? 평화의 하나님이 아닙니까? 하나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일부러 전쟁을 일으켜서 그 무수한 학살이 자행되도록 하신 다음에 정신을 차리게 해서 자신에게 복귀하도록 하는 그런 무지막지하고 잔혹한 하나님을 우리는 세상에 전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야망과 욕심, 그리고 죄로 인한 결과를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상투적인 신학적 교설을 우리는 이제 버려야 합니다. 1차 대전의 신앙적 교훈은 인간이 이성에 대한 신뢰를 버려야 한다가 아닙니다. 전쟁의 원인이 거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불바다 속에서 인간은, 욕심을 앞세워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면 어떤 처참한 죄를 자초하는가를 깨우친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였습니다. 전쟁을 벌인 책임은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을 자랑하고 이로써 문명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고 뻐긴 인간 자신 안에 얼마나 무서운 욕심과 죄가 들어차 있는가를 직시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새삼 귀를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란 그냥 내버려두면 죄와 욕심을 정당화할 뿐이며, 하나님의 진실 안에서 비로소 진정한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깨달음도 잠시, 인류는 또다시 국가의 야만적 폭력과 탐욕에 취해 제2차 대전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이 거듭되는 전쟁은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에 계신 것인가 하는 깊은 절망과 회의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인간의 극악한 죄 앞에 서신 하나님의 끝없는 고통과 깊은 침묵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경험은 이 하나님 이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합니다. 그 하나님의 고통과 침묵에 귀가 열린 이들은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다,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시다, 인간을 짓밟고 모멸하고 갈등을 부추기며 전쟁을 일으키는 모든 제도와 사상과 체제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이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로써 반전평화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기독교 신앙은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세워나가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전병욱 목사 식의 전쟁에 대한 역사관이라면, 하나님이 일으키신 1차 대전 중에 반전운동을 벌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정말 잘못된 역사관이자,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편협하고 잔혹하며 전쟁광처럼 만드는 신학은 모두 거부되어야 마땅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무수한 강자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앞세워 자신들의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정당화했다는 사실(史實)을 안다면, 우리는 전병욱 목사류의 전쟁관이나 전쟁에 대한 역사신학적 해석을 철저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희망을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것을 깨달아, 특히 젊은이들은 바른 역사신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추가할 바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핵심만 일단 정리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잘못되면 불의한 세력을 옹호하는 그릇된 길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와 대립하는 결과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전병욱 목사든 누구든 그 주장의 외형적 형태만 보지말고 그 주장을 뒤받침하고 있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바른 지식을 가져, 바른 신앙의 바른 기초를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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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목사의 <153> 비판적 읽기(최종회) |
좀 더 진지하고 솔직해져서 더 깊은 공부를 할 수 있기를 |
지금까지 <전병욱 읽기> 시리즈를 통해 그의 설교와 메시지에 대하여 비판으로
일관해왔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그의 글과 발언에서 심각한 문제를 많이 발견했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비판적 읽기의 과정에서 전병욱 목사를 포함하여 그를 아끼고 따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상처와 심리적 고통을 받았을 것을 충분히 짐작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미 수 차례 밝힌 대로, 이러한 비판적 논쟁이 한국교회 내부에 말씀의 본질을 바로 잡아나가는 일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이 작업을 진행해왔습니다. 전병욱 목사의 장래를 소망합니다. 이 글들에 대한 반응 가운데 언제나 마음이 걸렸던 것은 과연 전병욱 목사의 메시지가 언제나 그렇게 타기할 만한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가, 라는 반발이었습니다. 이 반발과 반론은 정당하고, 또한 옳은 것입니다. 적어도 목회자가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이에 대하여 감동을 받고 신앙의 사명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은 그 말씀에 나름대로의 힘이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내용의 방향과 심도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따른다고 그 말씀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단 그 가치를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병욱 읽기> 시리즈가 전병욱 목사에게 지나치게 과도한 비판을 가한 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시리즈에서 제기한 문제들만큼은 그가 지니고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또 한국교회가 아무런 반성 없이 지나치거나 받아들이고 있는 사안들이라는 점에서 전병욱 목사를 포함하여 우리들 모두가 함께 자기 성찰적으로 짚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그 다음 단계의 말씀의 진보를 향한 노력에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 전병욱 목사는 자신의 주장으로는 성공주의를 배격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성공주의를 부추겼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권고하고 있으나 그의 안목이 피상적이고 수박 겉 핥기 식의 접근이 너무 많이 발견되는 등 좀 더 깊이 성장해야 할 대목이 적지 않게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그가 <153 II>의 에필로그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간의 불균형한 성장과정을 보고 그 결말을 판단하는 우(愚)를 범하는 것은 잘못이기에, 이제까지 제기했던 문제들이 전병욱 목사 자신의 본질적인 오류로 계속 지속될 것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그 또한 앞으로도 성숙해나갈 존재이고,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풍부한 편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전병욱 목사만큼 자신의 일에 열정과 헌신을 다하는 젊은 목회자도 드문 판국이기에, 우리는 그의 장래를 아끼는 마음에서 우리의 비판을, 비록 당장에는 쓰지만 속 깊이 삼켜서 또 하나의 저력으로 삼아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그의 메시지에서 은혜가 있는 부분까지 몽땅 도매금으로 비난의 대상으로 삼을 의사도 없고, 또 그렇게 할 까닭도 있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을 지배하는 신학적 논리와 시각의 문제가 그의 메시지에도 깊이 침투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우려했던 것이며, 이를 계기로 한국교회의 강단에 새로운 힘이 나오기를 갈망하는 우리 모두가 이로써 바른 지향점을 발견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비판의 과정에서 찬성과 반대, 지지와 비난 등이 교차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오류는 과감히 털어 버리고, 서로 배우는 자세로 새로운 말씀의 샘터를 터뜨려 한국교회의 앞날에 헌신하는 노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마지막 글에서는 전병욱 목사의 <153 II>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중심으로 기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그러면서 그 한계와 발전의 방향도 함께 언급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비판에 대한 미안함으로 인해 시도하는 "전략적 예의"나, 글을 마치려는 시점에서 대충 정리하려는 적당한 타협이 아닙니다. <153 II>는 그의 기존의 다른 책이나 글과는 다른 차별성을 그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점들을 그가 열심히 살려나가, 훌륭하게 발전시켜나갈 수 있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전병욱 목사가 진실로 <153 II>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겸허해지고 진지해지며 기도와 말씀의 지혜가 풍요한 그런 목회자로 계속 자라나기를 비는 바입니다. <153 II>의 힘 <153 II>의 접근은 기존의 그의 글이나 발언과는 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드는 예들도 이전에 우리가 비판했던 경우와는 달리, 별로 무리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바로 하고, 교회생활에 충실한 자세를 길러내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아무래도 아쉬운 것은 요한복음 강해인데, 본문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은 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전편에서도 지적했듯이 그의 신학적 피상성과 성서독법의 심도에 아직 깊이가 쌓이지 않은 결과라고 여겨집니다. 이는 그의 젊은 나이로 충분히 설명되고 세월이 지나면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하는 바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전병욱 목사가 좀 더 진지하고 솔직해져서 더 깊은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자기과시적인 면모를 인격적으로 극복하는데 실패하게 될 경우, 이 문제는 끊임없이 그 자신의 명예를 추락시키고 스스로를 괴롭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153 II>에는 소개할 만한 대목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의미있는 발언들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귀중하게 보는 문화와 생명을 우습게 여기는 문화의 차이점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선한 목자의 마음이 들어가면, 우리 주변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을 품을 줄 알고, 그 속에 있는 가능성을 볼 줄 알고, 그 속에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립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을 선한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품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좀 많이 배우고, 내가 좀 가진 것이 있고, 내가 남들보다 좀 앞섰다고 나보다 모자란 사람들을 멸시하고 비난하고 누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눈물 흘릴 수 있는 선한 목자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사회적으로 그 외연을 확장하여 이 시대의 아픔과 고난에 대하여서도 그의 메시지가 파고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민중적 현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운동권적 관심 운운으로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실로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이들의 자리에 서서 오늘의 무수한 고난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을 불어넣는 그런 교회로 한국교회가 되어갈 수 있도록 우리는 간절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넘어져도 은혜요, 일어서도 은혜요, 전진해도 은혜요, 후퇴해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들어 쓰시면 어떻게든 다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낙망하고 좌절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위로와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로 하나님의 장중에 속한 이들에게는 넘어짐이나 서 있음이나 다 은혜의 발판이 됩니다. 하여 우리에게는 낙심이 없고, 강한 믿음으로 역사하는 미래가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넘어짐과 후퇴함이 우리의 이 혼란스럽고 어려운 역사의 국면에서 어떤 의미의 메시지로 구체화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의 공동의 과제일 것입니다. 지금은 너나 할 것 없이 동요하고 중심을 잃어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를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교회는 참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대(對)사회적 발언의 예언성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왜 넘어져도 은혜인지, 왜 후퇴해도 은혜가 되는지 우리는 이 뼈저린 현실의 위기 앞에서 증언해내야 하고, 간증할 수 있어야 하며, 이로써 확신이 있는 사회로 한국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논리가 이런 것입니다. 서로 앞서가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긴장감으로 인해 저녁 때가 되면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세속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속의 질서에 들어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집니까? 이 질서가 다 깨져 버립니다. 앞서가려는 경쟁의 논리가 깨져서 섬김의 논리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이 세상을 섬김의 원리가 지배하는 땅으로 만들어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전병욱 목사가 그토록 칭찬했던 스위스 다보스 회의에 모이는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논리로 이 세상을 무지막지한 경쟁의 체제로 만드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세력들입니다. 섬김의 논리를 적대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전병욱 목사는 자신의 모델을 다른 곳에서 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정부가 취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한국사회를 경쟁의 정글로 만들고 있습니다. 섬김의 논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당연히 이와 맞서서 그 정책의 추진에 저항해야 합니다. 한국사회의 섬김의 정신을 회복하는 주장을 널리 펴고 그에 맞는 정책과 사회구조로 이 땅을 바꾸어 나가는 일에 한국교회는 앞장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섬김의 논리는 패자의 항변이 되기 쉽습니다. 현실에 부대끼며 사는 교인들의 좌절감만 깊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장과 고백에 대하여 현실적 책임을 지고 그것이 관철되도록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교회도 살고, 한국사회도 거듭 날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죄다 누림과 군림의 원리로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우리는 과연 그대로 두고만 볼 것입니까? 매섭게 질타해야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고꾸라지게 해야지요. 그래야 교회가 진정 힘있는 권위를 가지고 이 세상의 소금과 빛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눈치만 늘고 교회 안에서 만의 섬김만 강조하는 모임이 되고 있다는 사실, 우리는 퍼뜩 깨닫고 사태를 반전시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대로, "과거 초대 교회는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교회였는데, 지금은 교회가 앉은뱅이가 되었습니다." 어떤 앉은뱅이입니까? 이 시대를 일깨우려는 뜨겁고 강하며 큰 비전과 열정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안주했고, 기도와 말씀을 강조하지만 그 안에는 이 시대의 고뇌와 역사의 부르짖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대를 일으킬 수 있는 교회가 되지 못하고 시대와 함께 고꾸라져서 앉은뱅이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어떤 한 가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을 반대하는 세력에 맞서서 생명을 걸고 투쟁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백 번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한국교회는 이 원리를 시대와 역사, 정치와 경제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삶의 현장에 적용시키는 일은 꺼려합니다. 교회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한 선한 투쟁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한국교회는 점점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있는 중입니다. 전병욱 목사도 오늘의 역사, 그 현장에서 이 사랑의 싸움에 치열한 젊은 목회자가 되기를 빕니다. 그러면 그의 메시지는 실로 생생한 역사의 육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균형은 무엇인가? 많이 자란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자라지 못한 부분을 더욱 자라도록 독려하고 세워주는 것이다... 자르는 것이 균형이 아니라 자라는 것이 균형이다." 참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전병욱 목사의 설교에서 이따금 누군가에 대한 빈정거림과 공개적인 희화화(戱畵化)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의 말대로 자라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자르는 식의 논법이라는 점에서 그의 말씀대로 사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오늘날 경쟁과 능력의 사회에서 강요하는 것은 자라도록 함께 돕는 것이 아니라, 앞서 간 자들의 기준에 맞추어 낙오한 자들을 자르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오늘은 누가 잘리나, 내가 잘릴 순서는 언제인가 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단지 교회 안에서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한국사회가 가동하고 있는 원리 자체가 바로 이렇게 인간의 아름다운 성장을 가로막고 그것을 능력과 효율이라고 가르치면서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공주의는 이러한 사회의 목표이자 산물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질서의 근본을 치고 들어가야 합니다. 경쟁시켜서 잘라내는, 그래서 소수의 성공한 자들이 지배하는 그런 무서운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는 이 현실에 저항하고 극복하면서 사랑과 섬김과 나눔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교회는 앞장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는 말은 그럴싸하게 하면서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영 딴판인 그런 모순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신뢰받지 못하는 집단이 됩니다. 현실에서 구체적인 실천의 힘을 갖지 못하는 능력없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한국사회의 정신적 부패와 영적 혼돈을 일깨우고, 서로 함께 위하고 아끼며 사랑하고 섬기는 그런 나라를 일으켜 세워 나가야 할 막중한 책임이 교회에게 있습니다. 이 사명을 저버리면 결국 교회주의에 빠져 교회만의 성장에만 주력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중대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그간 <전병욱 읽기>시리즈를 읽고 비판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독자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보냅니다. 이 작업이 아직은 생소하고 부족한 점이 많아 우리들 스스로 자기비판적으로 이 작업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비판에 주력한 나머지 사랑의 마음을 잃은 적은 없는가, 논쟁에 급급해서 주장의 과시에 몰두한 적은 없는가, 충분한 장점이 있으면서도 비판을 위한 비판에 집착하여 장점에 대한 부각은 도외시하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병욱 목사에 대한 인신공격을 한 적은 없는가 등등의 문제를 엄중히 자기 점검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여러 가지 부족한 바가 있으나 이 설교비평의 작업이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대에 어떻게 선포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디 이러한 작업이 한국교회의 개혁에 귀중한 계기를 마련하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여러분 모두에게 신년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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